국내 대형 법무법인들이 인공지능(AI) 접목과 고사양 장비 도입 등을 통해 디지털 포렌식 역량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각종 수사와 행정조사에서 디지털 증거의 비중이 커지는 데다 기술 탈취 분야에서 이른바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K-디스커버리)’가 도입되면서 로펌들이 관련 분야에 힘을 싣는 모습이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무법인 세종은 올해 2월 디지털 포렌식 솔루션 ‘액시엄(Axiom)’의 최상위 버전인 ‘사이버(Cyber)’를 도입했다. 이 솔루션은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에 남아 있는 디지털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데 활용된다. 휴대전화 사용 흔적(Artifact) 분석은 물론 악성코드 탐지, 원격 데이터 수집 등의 기능도 포함하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는 이디스커버리(eDiscovery) 솔루션에 AI 기능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이디스커버리 솔루션 제공 전문 기업과 협의를 진행했다. 법무법인 광장은 내년 상반기 본격 시행을 목표로 내부망 기반 온프레미스(On-Premise) AI 구축을 연구 중이다. 증거 자동 분석을 구현하면서도 외부 유출 위험을 차단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문 인력 확보 경쟁도 이어지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은 지난 3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연구원 출신인 최원선 외국변호사(미국)를 영입했다. 광장에는 지난해 대검찰청 반부패1과장을 지낸 김영철 변호사에 이어 올해 3월 대검 조직범죄과장 출신인 최재만 변호사가 합류했다. 법무법인 태평양도 지식재산권(IP) 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홍정훈·김일권 변호사를 영입한 바 있다.
대형 로펌들이 디지털 포렌식 분야를 강화하는 배경에는 수사와 각종 조사에서 디지털 증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 있다. ‘딥페이크’를 비롯한 디지털 영상, 각종 위·변조 문서가 늘면서 수사·조사·재판 전반에서 증거의 진위 판단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술 탈취 사건에서 피해 기업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K-디스커버리 제도가 올해 처음 도입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기술자료 유용 행위에 대한 증거 접근권을 강화하기 위해 K-디스커버리를 도입하는 내용의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안은 앞서 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K-디스커버리는 민사소송 등 법적 분쟁에서 재판 전에 당사자들이 서로 관련 증거자료를 요구하고 제출하도록 하는 절차로, 미국과 독일, 일본 등에서 시행 중이다.
최성진 세종 변호사는 “현재는 거의 모든 자료가 디지털화돼 있어 검경 수사는 물론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행정조사에서도 디지털 포렌식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며 “기업의 해외 소송은 물론 내부 감사에서도 디지털 포렌식이 핵심 분야로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K-디스커버리는 기술 유출 분야에 한정돼 있지만 향후 적용 범위가 확대되면 디지털 포렌식의 활용도도 더 커질 수 있다”며 “과거 디지털 포렌식이 수사·조사에 대한 대응 수단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기업의 사법·행정 리스크를 조기에 차단하는 예방 수단으로 성격이 확장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