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한-유럽연합(EU) 공동성명에 반발하며 이재명 정부를 향해 “평화의 가면을 벗어던졌다”고 비난했습니다. 공동성명에 포함된 ‘러시아-북한 간 불법적 군사협력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문구와 북한 핵보유국 불인정 원칙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 같은 북한의 반발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면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유럽순방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청와대는 이번 한-EU 공동성명에 담긴 내용은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북한 비핵화 원칙도, 북러 군사협력에 대한 우려도 이미 한국 정부가 유엔 안보리 결의와 국제사회 논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밝혀온 기조를 유지한 수준이라는 얘기입니다.
EU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만큼 공동성명에는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 문제와 북러 군사협력 문제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취재진을 만나 “우리가 북한 핵 문제 등에 밝힌 원칙이 한반도에서 긴장 완화하겠다는 접근과 상치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며 “언제나 원칙은 원칙대로 밝히고 추구해 가고, 비핵화 추구해 가고, 평화 정착·긴장 완화도 추구해 나가는 두 개의 동시적인 목표가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靑 “북한핵문제 원칙 대응·한반도 긴장 완화 상치안돼”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번 유럽 순방 중 열리는 주요7개국(G7)정상회의에서 한미정상 간의 회동 가능성을 묻자 “이번 유럽 순방은 주안점이 역시 유럽”이라고 답했습니다. 통상 해외 순방 때 한미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되곤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발언입니다.
해당 관계자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G7에 초청받은 것이기 때문에 유럽에 포커스가 있다”며 “EU는 미국 중심의 변화하는 여러 국제질서 속에서 기존의 국제 통상 질서를 지켜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중요한 실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EU라는)실체와 한국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순방이 추진됐던 것”이라며 “EU의 주요한 멤버들인 벨기에, 이탈리아와 양자회담을 진행한 것이고, G7에 가서도 같은 맥락에서 정상외교를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 통상질서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은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외교·통상의 운신 폭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만큼 EU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EU와 협력 강화를 위해 공동성명에 북한 규탄 표현이 들어갔지만 이 역시 이미 공표된 수준에서 특이점이 없다는 점을 부각하며 확대해석을 진화한 것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 순방기간 중 일본 교도통신의 단독 보도가 눈길을 끕니다. 교도통신은 6월13일자 보도를 통해 한국 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 신청 방침을 굳히고 이달 말 국무회의에서 발표하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한일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이 가입 신청을 하면 일본 정부는 이를 지지할 전망”이라고 전했습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아직 가입할 만큼 진전된 것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 언론이 한국 대통령의 유럽 순방 기간 CPTPP가입 가능성을 열어두며 외교정책을 분석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한국이 외교노선의 다각화를 통한 활로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포착한 것입니다. 유럽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다자무역 체제와 연결고리를 확대하며, 동남아와 인도 등 새로운 시장과의 협력을 넓혀가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자연스럽게 일본 언론이 CPTPP에 한국 가입을 예측하며 가능성을 높게 본 배경인 셈입니다.
한국 외교노선 다각화 활로모색 포착한 日언론
무엇보다 미국에 맞서는 EU역시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조치들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통상국가인 한국 입장에서는 이를 지켜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철강 관세쿼터(TRQ) 축소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제도로 이 대통령은 순방 기간 해당 문제들의 문제해결에 집중했습니다.
실제 10일(현지시간) 이 대통령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EU 정상회담에서는 철강 관세쿼터(TRQ)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다음날 이탈리아 로마 프레스센터 브리핑에서 “아직 공개할 수는 없지만 여타 국가 대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EU 철강 관세쿼터에 김용범 “좋은 결과”자신감
EU는 다음 달 1일부터 새로운 철강 수입 제도를 시행합니다. 철강 무관세 수입 물량(TRQ)을 현재 3382만 톤에서 1835만 톤으로 약 46% 축소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기존 25%였던 관세를 50%로 인상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미국 보호주의에 맞서는 EU식 대응 방법의 하나입니다.
당장 전체 철강 수출 2825만 톤(2025년기준) 가운데 324만 톤을 EU에 수출한 한국으로서는 쿼터 축소가 현실화할 경우 철강업계는 물론 자동차·조선·기계 등 연관 산업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됐습니다. 김 실장은 “이 대통령은 한국이 EU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이자 전략적 동반자로서 우호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습니다. EU 역시 한국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트너로 평가하며 한국의 요청을 최대한 고려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할당 물량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와 협상 전략 상 공개가 되지 않고 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통령이 EU에 공을 들이며 활로를 모색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북러 군사협력 ‘규탄’ 논란…이재명 정부 외교 정책 몰이해
결국 이번 순방과정에서 벌어진 북러 군사협력 규탄 문구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점은 외교 정책 전반의 몰이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 협상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북한이 즉각 반발하는 형국이지만 한-EU 공동성명에 담긴 대북 메시지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수준에 가깝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프발 보호무역주의와 국제질서 재편 속에서 한국이 EU라는 세계 최대 규범 기반 경제권과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며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읽힙니다. 트럼프 시대에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면, EU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외교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의 생존 공간을 넓히는 것이 두 번째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구상입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 장기과제
외교통상 지평 확대 병행전략
이는 한반도 문제와 통상 문제를 분리해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관리하겠다는 전략에 가깝습니다.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장기 과제를 추진하면서도 EU와 CPTPP, 동남아 등으로 외교·통상의 지평을 넓혀 대한민국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반발이나 공동성명 속 특정 문구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왜 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유럽 순방에서 EU를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선택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트럼프 시대를 맞아 미국을 관리하면서도 유럽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다자무역 질서를 지키며, 새로운 생존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 이번 유럽 순방의 본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