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강정원 당시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가 전격 사퇴했다. 공식 선임 1주일을 앞둔 상황에서 긴급 이사회를 열 정도로 다급했다. 그는 “회장 선임 절차가 불공정했다는 비판 여론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금융감독원의 고강도 검사가 먹혀든 결과였다.
강 내정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가 주도한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 투자 건은 1조 원에 가까운 손실을 냈고 영업점 업무분리제는 철저히 실패했다. 입으로는 ‘국제적최고관행(IBP·International Best Practice)’을 외쳤지만 실상은 사외이사들과 서로의 임기를 위한 이익공동체를 만들었다.
다만 금감원의 검사도 뒷말이 많았다. KB국민은행 주요 부서장 컴퓨터 13대의 자료를 받거나 봉인했다. 압수수색 권한이 없는 금감원이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 갔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다.
강 내정자의 운전기사 2명과 차량 운행 일지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검사에 참여했던 한 직원은 몇 년 후 기자에게 “그때 특정인의 여성 문제를 알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술자리에서의 얘기여서 진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금감원의 업무 범위를 한참 넘어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16년도 더 된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금감원의 사회공헌 조사 때문이다. 금감원이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에 대한 사회공헌 활동 현장 조사에 이어 KB금융에 대해서도 같은 조사에 나선다. 사회공헌 활동이 목적에 맞게 집행됐는지 따져본다는 것이다. 브랜드 및 상품 광고 금액과 연도별 집행액, 기부금 내역 등을 살펴본다고 한다.
현행 금융위원회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은 금감원이 금융사의 업무 및 재산 상황에 대한 검사, 제재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금융사의 업무라는 표현을 써 광범위한 검사와 조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당국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금융사의 건전성 및 시장 안정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보는 게 적확하다. 개인의 사생활이나 은행의 사회공헌 활동이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낮추고 금융시장을 뒤흔들 사항인가.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동의가 어렵다.
전직 금융위원장은 “왜 금감원이 사회공헌 활동까지 조사하냐”고 답답해 했다. 지난해 은행이 사회공헌 활동에 쓴 돈이 2조 1560억 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칭찬한 신한금융의 ‘그냥 드림’ 사업이나 우리은행의 신용대출 금리 7% 상한은 은행의 대표적인 사회공헌 사업이다. KB금융이 2008년부터 해온 빙상 종목 후원은 어떤가. 하나은행의 중금리대출과 소상공인 ‘성공사다리대출’ 역시 포용금융과 사회공헌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다.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미국과 유럽의 감독 당국이 은행의 사회공헌 활동을 조사, 검사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사회공헌 활동은 어디까지나 기업의 자유다. 세부 항목을 샅샅이 뒤져 마케팅용으로 쓰이는지 따져본다는 것은 실제 의도와 관계없이 당국이 특정 목적을 갖고 사회공헌 활동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금감원의 ‘정치화’를 우려한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때부터만 따져도 당국이 금융사 인사 개입 논란을 일으켰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때마다 외부 압력 얘기가 있었다. 강 전 내정자의 사퇴 배경에도 청와대가 낙점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중론이었다.
금감원의 중징계를 받고 쫓겨났던 이들 중 상당수는 대법원에서 판단이 뒤집혔다. 새 정부 들어서도 금감원이 BNK금융 회장과 전북은행장 인사에 제동을 걸었지만 판을 뒤엎을 만한 사실은 나오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높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500원대를 웃돌고 있고 주식시장 쏠림 현상과 하반기 기준금리 인상 전망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첨단산업 지원을 위한 감독 정책 변화와 그에 따른 리스크를 따져보는 일도 금감원의 몫이다.
당국의 사회공헌 조사는 명분도 실리도 없다. 시장 상황이 한가하지 않다. 업계에서 “금감원에 책무구조도를 도입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곱씹어봤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