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항로 개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명사적 관점에서 북극항로 개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저주를 축복으로 반전할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교수는 “항로는 선점해도 경쟁에 노출되지만, 거점항구는 한 번 유치하고 나면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마련”이라며 “미국의 대중(對中)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러시아의 동진이 북극항로의 개통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이런 기회는 우리 민족사에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는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전후 대불항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대한민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할 가능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유리한 협력 기회가 열릴 것이며, 그 기회는 종전 이후 1~2년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러-우 전쟁이 끝나면 주변국들이 모두 거점항구 확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이라며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항로로 대부분 러시아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포함된 만큼 러시아의 관계가 중요하다. 단순히 항해 거리 단축 차원을 넘어서 글로벌 물류 체계가 재편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 교수는 그 의미에 대해 “북극항로는 배들이 스쳐 지나가는 항로일 뿐 이를 붙잡을 기착지가 없으면 대한민국은 단순한 통과지에 그치게 된다”며 “거점항구를 확보하면 부산·울산·경남(부울경) 지역에 싱가포르 같은 경제도시를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점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범부처 기능을 아우르는 컨트럴타워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김 교수는 “박정희 정부 시절엔 청와대 경제2수석실이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추진하는 컨트럴타워 역할을 했다”며 “거점항구는 선박 연료 벙커링부터 생산과 환적, 인공지능(AI)을 통한 스마트 항만 및 통상까지 여러 분야가 관련돼 있다.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를 비롯해 외교부, 산업통상부, 재정경제부가 원팀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4~5개 이상의 부처가 연계된 만큼 청와대에서 이를 총괄할 컨트럴타워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북극항로 개설이 예상보다 빨라질 것이란 전망도 제시했다. 기후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 등으로 북극의 해빙이 녹아 북극을 통한 항해가 가능한 시점을 2030년 이후로 예측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지난해 중국 컨테이너선이 쇄빙선 없이 단독으로 출항 20일 만에 북극항로를 통과해 영국에 도착한 사례를 소개하며 북극항로 항행 상의 난관이나 애로사항들은 당장 해결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선박기술 발전으로 유빙이나 항법시스템의 불안정 등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며 “올해 중국이 북극해 정기항로 개설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북극항로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석유에너지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콜로라도 스쿨 오브 마인스(CSM) 자원경제학과에 지원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울대 자원공학과에서 에너지정책을 강의하며 셰일 혁명을 예측했고 산업공학과로 자리를 옮겨 국가발전원리를 연구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초대 대통령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을 지냈고, 2010년 초부터는 북극항로에 주목해 강연, 출판 등을 통해 그 중요성을 알려왔다. 그는 “대한민국의 무역과 물류는 특정 항로에 편중돼 있어 심각한 구조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며 “중동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것이나 남중국해에서 양안전쟁이나 해양 영토 분쟁 등으로 언제든 또다시 항로가 막힐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심각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동전쟁이 미·중 패권 전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가져올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했다. 그는 “중동전쟁 이후 전쟁 복구 비용이 원유 비용으로 전가돼 원가가 크게 올라가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비쌌던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며 “러시아 석유 수출이 통제에 이어 이란의 석유 시설 공격 등 중동의 석유 물량도 축소되면서 미국의 ‘오일 패권’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