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경제 부처 수장들과 학계 전문가들이 현재 경제 상황을 “미시적인 처방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기존 경제 상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성장과 물가, 환율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거시 전반을 어떻게 진단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경제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이른바 ‘3고(高) 현상’에 대해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가 “성공의 비용” “도약의 마찰음”으로 규정한 것을 두고 발언의 배경을 떠나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경제팀의 위기 대응 체계부터 재점검할 것을 주문했다.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는 5일 “현재 코스피지수가 지표상 호조를 보이는 것은 사실상 반도체 두 대기업이 견인한 착시”라며 “외국인이 차익 실현을 하고 나간 자리를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빚을 내어 떠받친 형국인데 이를 두고 당국이 구조적 리밸런싱이라며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국 외인 좋은 일만 시켜주고 개미들은 상투를 잡았다는 얘기밖에 더 되느냐”고 꼬집었다.
앞서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달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공의 비용’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오늘의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은 한국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골프와 선거는 고개를 들면 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경제팀까지 교병필패(驕兵必敗)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전직 경제 부처 수장들은 최근 고환율이 과거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무역수지 악화 국면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현재 환율 상승은 주식시장에서 외국인투자가들이 대규모 차익 실현에 나서며 자금을 빼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관호 한국금융학회장(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도 “반도체 중심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엄청나게 늘고 있지만 이를 능가할 정도로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다”며 “여기에 국내 기업들까지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위해 달러를 유출하면서 공급보다 수요가 압도하는 환율 상승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환율 안정 해법을 묻는 질문에는 금리 인상 등 거시 정책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 전 부총리는 “환율을 안정시키는 가장 전통적인 수단은 결국 금리 정책인데 지금은 그것도 쉽지 않다”며 “반도체 외에는 다 별로 안 좋은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더 힘들어지고 부채 문제도 있어 정교한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권남훈 산업연구원장은 “결국 국내로 달러 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내 투자 환경 개선, 기업 유턴 정책 등을 통해 한국에 투자할 유인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경제에 투자할 수 있는 매력을 높이는 정책이 나와줘야 한다는 의미다.
고물가에 대한 근본 처방으로는 ‘통화정책 중심의 긴축’과 ‘재정의 절제’를 주문했다. 다만 K자형 양극화로 인해 고물가·고금리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취약 계층에 한해서는 정교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 교수는 “생각보다 높은 성장률과 물가 수준을 감안할 때 반도체 호황 등으로 늘어난 세수를 정부 지출로 다 쓰기보다는 국가 재정의 체력을 비축하고 지출을 절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나 장바구니 물가 지원 등 재정을 투입해 물가 안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돈을 더 푸는 형태가 돼 중장기적 물가 안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물가 안정을 위해서는 통화정책이 중심이 되고 재정은 보완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통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되 정부의 재정 정책은 그 긴축 과정에서 생계 위협을 받는 취약계층과 중소·중견기업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 정책 공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복합위기 수준인 거시경제의 난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정부와 한은 간 빈틈없는 정책 공조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 전 위원장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기보다 애초에 기관별 정책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거시경제 사령탑을 중심으로 경제정책의 적정한 속도와 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