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2차전지 등 우리나라의 여러 주요 산업들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 덕분에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양국 관계가 좋을 수는 없겠지만 만약 미국이 중국과 ‘딜’(타협)을 하는 과정에서 규제를 한 두 개라도 풀어주면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강석훈 K정책플랫폼 이사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호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수 있다며 이 같이 지적했다.
강 이사장은 학계에서 정치권을 거쳐 정부의 주요 직책을 경험한 경제·산업·금융 정책 전문가다. 1991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97년부터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에 이어 박근혜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았고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산업은행 회장을 역임했다. 올해 4월 국회 산하 사단법인 싱크탱크 ‘K정책플랫폼’의 3대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최근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 발전에 따른 수요 증가의 수혜를 입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슈퍼 호황’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그러나 강 이사장은 이에 대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며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이 네덜란드 기업 ASML가 독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중국 판매를 허용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술 격차는 거의 사라진다고 본다”며 “중국이 낸드 분야는 거의 쫒아왔고, 파운드리(위탁 생산)는 일부 앞서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UV 노광장비는 3㎚(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하 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공정에 필수적인 장비로, 미국이 2019년부터 중국에 대한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업 화웨이는 EUV 노광장비 없이도 2031년까지 1.4㎚ 반도체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이달 25일 공개했다. 이 같은 계획이 현실화되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운드리 업계 1위 TSMC는 동일 사양의 반도체를 2028년, 삼성전자는 2029년부터 각각 양산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강 이사장은 반도체 산업 슈퍼 호황에 따라올 ‘슈퍼 불황’을 대비한 기술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방안으로 “협력기업들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 조성, 메모리 분야를 뒷받침할 파운드리 분야 육성 등의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 이사장은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 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경제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라며 경제 성장 자체는 목표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이미 상당한 부자가 됐지만 왜 부자가 되려고 했는지 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경제의 양적 성장은 이뤄졌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 공정 등 가치의 측면에서는 그만큼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강 이사장은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득 분배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소득 분배와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작성했고, 19대 의원 임기인 2015년 기회균등 촉진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교육·고용·공공서비스 등에서 동일한 기회를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강 이사장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우리나라가 지향할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과거에는 시장 원리에 따른 자원 배분과 자유무역을 추구했던 신자유주의가 중심이었다면 오늘날은 국가가 보호무역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면서 경제와 안보의 융합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 경제 발전 시기가 지도에서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는 공간에서 항로를 찾는 더 어려운 프로세스에 도달했다”며 “한 축은 경제, 다른 축은 가치의 측면에서 어느 나라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 이사장은 오늘날 우리 경제의 최대 과제로 성장률 하락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 구조 변화를 꼽았다. AI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AI는 소위 ‘자동화’를 통해 인간을 대체하거나 인간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증강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며 “증강 기능의 AI는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 등 조직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 이사장은 AI의 발전으로 노동시장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정부 정책은 이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선 노동시장에 대해 “AI로 없어지는 일자리들이 있겠지만 과거 증기기관 발명 등 기술이 발전할 때처럼 새 일자리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AI 시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빠른 속도의 기술 발전에 따라 지식의 가치가 낮아지는 속도 역시 빨라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부해서 취업하고 정년을 맞아 직장에서 은퇴하는 과정 대신 공부해서 취업하고 다시 공부와 취업이 반복되는 과정이 노동시장에 자리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그는 “사라지는 기존 일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로 옮겨가야 한다”며 “정부의 가장 훌륭한 소득 분배, 복지 정책은 그 이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돕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이사장은 경제학자이자 K정책플랫폼 이사장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간다는 계획이다. 그는 “전세계 어느 국가도 정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며 “2000년대까지 미국 중심 세계 질서를 나타내는 ‘워싱턴 컨센서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계기로 세계의 주요 국가로 부상한 중국의 ‘베이징 컨센서스’처럼 과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경험을 담은 ‘K컨센서스’를 제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K정책플랫폼이 지향할 방향으로는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공론장의 기능을 하면서 새로운 국가 운영 모형, 이를 위해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 의제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