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한국 콘텐츠가 가진 문화적 구체성(Cultural Specificity)이야말로 글로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비전이 됩니다.”
미국 LA 할리우드에서 아시아·태평양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비영리 단체 엔터테인먼트 아시아·태평양 연합(CAPE·Coalition of Asian Pacifics in Entertainment·이하 케이프)을 이끌고 있는 미셸 K. 스기하라 대표는 한국 콘텐츠가 나아갈 방향을 이같이 제시했다. 플랫폼 다변화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글로벌 미디어 환경이 격변하는 가운데,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K컬처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은 ‘우리만의 고유한 서사와 감각’을 타협 없이 지켜내는 데 있다는 제언이다.
스기하라 대표는 29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대강당에서 ‘알고리즘 미디어 시대의 아시안 보이스(Asian Voices in the Age of Algorithmic Media)’라는 주제의 대담에 참석해 케이프의 탄생 일화를 소개하며 K콘텐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케이프는 1991년 할리우드의 아시아계 고위 임원들이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외계인과 우주인이 아시아인보다 더 많이 보인다”고 한탄하던 문제의식에서 탄생했다. 미디어 속 정형화되고 부정적인 아시아인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설립한 케이프는 현재 할리우드 아시아계 창작자를 지원하고 임원급 인재를 육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5년부터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스기하라 대표는 “이야기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고, 제도를 바꾸기에 앞서 사람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면서 “스토리텔링을 위한 스크립트가 쓰이기 전 단계부터 아시아계 작가가 참여해야 하며, 최종 결정권을 쥔 쇼러너(Showrunner)나 ‘그린라이트(제작 승인)’를 내는 경영진 자리에 우리같은(아시아계) 사람들이 포진해야만 진정한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 특수성을 고려한 컨설팅, 인재 추천, 프로모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각적 노력의 결실로 ‘기생충’ 시사회 지원부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성난 사람들(Beef)’,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 등 글로벌 히트작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플랫폼, 아시아 창작자에 기회 주지만
AI의 인종차별적 데이터 학습은 경계
본지 공동후원 고려대 대담 성황
학생들에게 인적 관계 중요성 강조
대담을 이끈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샤머니즘, 정(情), 한(恨)과 같은 고유한 정서와 보편성의 융합에 관해 묻자 스기하라 대표는 ‘케데헌’을 사례로 들어 “문화적 특수성이 명확하게 녹아들어 있는 구체성이야말로 작품에 독창적인 색채와 풍미를 더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핵심 요소”라고 분석했다. 대담의 후반부는 생성형 AI와 알고리즘이 문화 다양성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마 교수는 “알고리즘 기반의 추천 서비스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이 전 세계인의 문화적 취향을 획일화하거나, 이용자들을 주류 시장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기하라 대표도 이 같은 지적에 공감하며 “2015년 전후로 시작된 스트리밍의 부상이 첫 번째 거대한 전환이었다면, 생성형 AI는 미디어 업계가 직면한 차세대 대변혁”이라며 “AI에 의한 일자리 대체 문제와 더불어 AI가 과거의 인종차별적이고 정형화된 데이터를 학습해 이를 고착화할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법과 제도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과도기인 만큼, 창작자와 플랫폼 경영진의 윤리적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담에서는 급속한 기술 발전이 아시아 창작자들에게 전례 없는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스기하라 대표는 “유튜브, 틱톡과 같은 플랫폼은 기존의 할리우드식 전통적 유통 모델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있다”며 “거대 스튜디오들이 합병을 거듭하며 제작 편수를 줄이고 질적 위주로 선회하는 위축기이지만, 독립적인 디지털 영역을 확보한 아시아계 창작자들에게는 오히려 롱테일 마켓을 공략할 새로운 무대가 열린 셈”이라고 분석했다.
1시간 넘게 펼쳐진 뜨거운 대담이 끝나자 대강당을 꽉 채운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학생이 엔터테인먼트 업계 진출을 위한 조언을 구하자 스기하라 대표는 인적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할리우드는 관계로 작동한다. 작품 크레딧에 같은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걸 보면 함께 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이번 첫 방한으로 여러분과 만난 것이 바로 그 관계의 시작”이라고 답했다.
한편 이날 행사는 고려대 미디어대학과 4단계 BK21 미디어학교육연구단이 공동 주최하고 서울경제신문 ‘픽셀앤페인트’(PIXEL & PAINT)와 유진ENT가 후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