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케임브리지대의 한 행사에서 컴퓨터 비전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앤드루 블레이크 교수를 만나 인공지능(AI) 시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조만간 AI 외교에 관한 토론 행사에 참가할 예정이라며 필자에게 “AI 외교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필자가 AI와 한국 문화를 주제로 진행했던 전시와 프로그램을 설명하자 그는 다시 “당신의 성취가 아니라 AI 외교를 정의해달라”고 질문했다.
그 순간 AI 시대의 핵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많은 정보의 나열보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AI 시대에 걸맞게 달라진 외교·문화유산 등의 개념에 대한 생각은 대화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거대한 질문 대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묻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가 보인다. 열린 태도로 호기심을 품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 같은 자리를 맴돌던 생각이 한 발 밖으로 나서면서 창의에 도달하게 된다.
행사가 끝날 무렵 미국의 한 AI 기업 투자자와 나눈 대화에서도 AI 시대를 맞아 높아진 질문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생성형 AI는 생성된 결과가 아니라 프롬프트를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질문은 사고팔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AI 시대의 문화 경쟁력 역시 질문에 달려 있다.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선도적인 문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묻고 답하며 판단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새롭게 다가온다. 실록의 상당 부분은 왕과 신하가 묻고 답하고 논박하는 대화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명령의 기록이 아니라 의사 결정 과정의 기록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철종의 재위 기간까지 472년의 시간을 품은 조선왕조실록은 거대한 지적 체계다. 그 진정한 가치는 분량에만 있지 않다. 권력의 말과 행동, 정치와 외교, 의례와 예술을 기록하면서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당시의 맥락과 함께 남겼다. 오늘의 생성형 AI가 프롬프트와 응답으로 작동한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질문과 답변으로 국가를 운영한 대화형 지성의 유산이다.
AI 시대의 문화유산은 그 속에 담긴 질문, 감정, 의례, 미감, 통치의 지혜를 과학기술을 통해 오늘의 시민과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새롭게 펼쳐내는 일이어야 한다.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의 ‘문화유산을 위한 AI 허브’ 프로젝트는 흩어진 박물관과 기록관의 소장품을 AI로 잇고 옛 목록을 해독하며 서로 다른 유산이 대화하게 한다. 새로운 연결은 대화에서 나온다.
AI는 빠르게 답을 만든다. 그러나 무엇을 물을지는 인간의 몫이다. 프롬프트는 단순히 사실을 담은 문장이 아니라 세계관을 담고 있다. 실록의 나라 한국은 AI 시대를 맞아 대화형 문화유산으로 세계와 다시 만나야 한다. 지금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한국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