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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 없이 피 한 방울로 뇌전증 진단 길 열린다

29.05.2026 1분 읽기

장시간 걸리는 뇌파 검사나 고가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없이 피를 뽑아 면역세포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뇌전증을 진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대병원은 주건·이상건 신경과 교수와 신용원 중환자의학과 교수, 홍상빈 입원의학센터 교수 공동 연구팀이 혈액 기반의 새로운 접근을 통해 드러난 전신 면역 패턴의 변화가 뇌전증 진단 및 뇌 위축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29일 밝혔다.

뇌전증은 뇌 신경망의 비정상적인 전기 활동으로 경련, 발작 또는 의식 소실, 행동 변화 등의 증상이 반복되는 특별한 유발 요인 없이 24시간 이상 간격을 두고 발작이 2회 이상 반복될 때 진단한다. 뇌전증은 그동안 뇌 자체의 문제로만 여겨졌으나, 최근 들어 전신 면역 체계의 이상이 발병에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뇌전증 진단에 필수적인 뇌파검사는 두피에 전극을 부착해 뇌세포의 전기 활동을 실시간 기록하는 방식으로, 발작이 없는 평상시에는 이상 뇌파가 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MRI는 종양, 혈관질환, 기형 등 뇌의 구조적 이상이 발작의 원인인지 확인하는 데 유용하지만 MRI만으로 뇌전증을 확진하기는 어렵다.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SPECT) 등도 검사 수행과 결과 해석에 시간이 걸려, 간편한 혈액 검사 기반의 진단 지표 도입이 절실했던 상황이다.

연구팀은 외부의 병원균과 싸우는 인체의 핵심 면역세포인 T세포에 주목했다. 혈액 속 T세포 표면에는 체내 침입한 적을 식별할 수 있는 고유한 유전자 서열 구조인 수용체(TCR)가 존재한다. 마치 상품마다 각기 다른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와 같다는 뜻에서 ‘면역 바코드’로 불린다. 평소 건강한 사람의 혈액에는 다양한 적에 대비하기 위한 수많은 종류의 면역 바코드가 골고루 존재한다. 몸속에 특정 병원균이 침입하고 이를 인식한 맞춤형 T세포가 집중적으로 증식하게 되면 한정된 혈액 안에서 전체 면역 바코드의 가짓수와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든다. 이를 면역학적으로 클론 확장(Clonal expans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연구팀은 뇌전증이 전신적인 면역 체계의 활성화를 동반하는 질환이라면, 환자의 혈액 속에서도 특정한 면역 바코드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면서 전체적인 다양성이 감소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에 들어갔다. 뇌전증 환자 45명과 건강한 일반인 대조군 55명 등 총 100명을 모집한 다음, 이들의 말초혈액을 채취해 T세포 수용체의 유전자 서열을 분석했다. 뇌전증 환자군은 약물 조절 양호 환자 14명, 난치성 환자 22명, 신경염증 관련 환자 9명으로 세분화해 질환의 중증도에 따른 차이를 살폈다.

그 결과 뇌전증 환자군은 건강한 대조군에 비해 전반적인 면역 바코드의 다양성이 현저하게 낮았다. 특히 약물이 듣지 않는 난치성 환자나 신경염증을 동반한 뇌전증 환자일수록 특정 면역 바코드만 집중적으로 증식하는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뇌전증이 단순히 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신 면역 체계가 불균형해진 상태임을 뜻한다는 게 연구진의 해석이다.

연구팀은 T세포 수용체 분석 결과를 토대로 뇌전증 진단과 중증도 평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했다. 18가지 면역 데이터 조합에 9종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적용해 총 162개의 진단 예측 모델을 구축한 다음, 성능을 검증한 결과 나이나 성별 등의 부가 정보 없이 T세포 수용체의 유전자 조합 패턴 데이터만을 집중적으로 학습시킨 모델(랜덤 포레스트 알고리즘)이 가장 뛰어난 감별 능력을 보였다. 이 모델은 혈액 분석 데이터만으로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일반인을 평균 80%의 높은 정확도로 감별해 냈다. 또한 인공지능(AI) 예측의 전반적인 변별력과 신뢰도를 나타내는 곡선하면적(AUC) 수치 역시 0.80을 기록해 비침습적 진단법으로서의 우수한 성능을 입증했다.

이러한 혈액 속 면역 지표 변화가 실제 뇌의 물리적 구조 변화와 직접 연결돼 있다는 데도 주목할 만하다. 뇌 영상 촬영이 가능한 환자 21명의 데이터를 추가로 분석한 결과, 면역 바코드의 다양성이 낮아질수록 뇌의 시상과 기저핵 부위의 부피가 감소하는 뇌 위축 현상이 확인됐다. 이들은 뇌에서 발작이 발생하고 퍼져나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다. 전신 면역의 활성화가 뇌전증 관련 신경 퇴행으로 이어진다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해석된다.

신 교수는 “이번 연구가 뇌전증 환자의 경과를 모니터링하고 향후 면역 조절을 통한 새로운 치료 전략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 교수는 “이번 연구는 그동안 뇌 자체 문제로만 인식됐던 뇌전증을 전신 면역 시스템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환자 개개인의 면역 상태에 기반한 정밀 의료를 실현하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인 ‘임상 및 중개 신경학 연보’(Annals of Clinical and Translational Neurology)‘ 최근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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