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국내의 ‘잔인한 금융’과 다른 결과를 내고 있다고 언급한 독일 저축은행 슈파르카세가 현지 민간 주택금융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은 대형 상업은행이 기업금융과 투자은행(IB) 업무에 무게를 두는 반면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은행이 가계와 지역 중소기업 금융을 폭넓게 맡는 구조가 뿌리내려 있다. 슈파르카세 역시 주택담보대출을 안정적인 기반으로 삼아 지역 주민과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관계형 금융 모델을 구축했다는 평가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독일의 민간 주택금융 대출 잔액은 1조 1164억 유로, 우리 돈 약 1907조 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슈파르카세의 점유율은 35.1%로 가장 높았다. 협동조합은행이 29.8%로 뒤를 이었고 도이체방크 등을 포함한 대형 상업은행의 비중은 18.9%에 그쳤다. 주택금융 시장에서 지역 금융기관이 상업은행보다 더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 은은 크게 상업은행과 저축은행, 협동조합은행으로 구성된 ‘세 기둥 체제’로 설명된다. 상업은행이 대기업 여신과 자본시장을 주로 맡는다면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은행은 지역 내 가계와 중소기업 금융을 폭넓게 담당한다.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은행은 지역 주민, 자영업자, 중소기업을 상대로 생활 금융과 지역 금융을 제공한다. 슈파르카세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과 감독에 참여하는 공적 성격의 저축은행이다. 수익 극대화보다 지역 내 금융 접근성 확보와 지역경제 지원을 우선하는 구조다.
슈파르카세는 예금과 대출은 물론 외환 등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지역 단위에서 제공한다. 특정 상품에 특화된 금융기관이라기보다 지역 주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종합 금융회사에 가깝다. 사실상 ‘지역형 유니버설 뱅킹’ 모델인 셈이다. 올 4월 기준 독일 전역에는 339개의 슈파르카세가 운영되고 있으며 점포 수는 1만 1000여 개에 이른다. 고객 수는 약 5000만 명으로 독일 국민의 60%가량이 슈파르카세를 이용한다.
슈파르카세의 경쟁력은 지역 내에서 돈이 돌도록 만드는 구조에 있다. 지역 주민의 예금을 기반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하고 여기서 확보한 안정적인 수익을 다시 개인과 ‘미텔슈탄트’로 불리는 지역 중소기업 여신으로 연결한다.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슈파르카세의 현재 주택대출 금리는 연 3~4% 안팎에서 형성돼 있다. 주택금융이 단순한 가계대출 상품을 넘어 지역 금융기관의 수익 기반이자 중소기업 금융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기업대출 구조에서도 이런 특징은 드러난다. 슈파르카세 등 독일 저축은행의 기업대출 가운데 장기 대출 비중은 약 78.5%에 달한다. 단기 대출 비중은 9.7%로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단기간의 수익성보다 장기 거래 관계를 통해 차주의 사업 내용과 상환 능력을 살피는 방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지역 금융기관이 예금과 주택담보대출, 중소기업대출을 함께 취급하면 고객의 거래 이력과 상환 능력을 장기간 파악할 수 있다”며 “이 같은 유니버설 뱅킹 구조가 금리와 건전성을 함께 관리하는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무게중심이 대형 은행에 쏠려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주택담보대출에서 예금은행이 차지한 비중은 65.9%였다. 저축은행과 상호금융을 합친 비중은 11.4%에 그쳤다. 지역·서민 금융기관이 관계형 금융을 확대하려 해도 안정적인 수익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독일은 저축은행이 주담대에서 확보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가계와 지역경제에 기여하는데 한국은 은행권이 주택금융을 대부분 가져가다 보니 서민 금융기관이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역시 주택금융에서 협동조합 금융기관의 비중이 높다. 크레디아그리콜과 크레디뮈튀엘, BPCE 등 프랑스 3대 금융협동조합은 2021년 부동산 담보대출 시장에서 77.4%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주택금융을 지역 기반 금융회사들이 상당 부분 담당한다는 점에서 저축은행과 상호금융권 비중이 10%대 초반에 그치는 한국과 대비된다.
다른 국가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스페인의 대형 신용협동조합 유로카하루랄은 지난해 말 기준 전체 대출 포트폴리오에서 주택 관련 대출이 61.4%를 차지했다. 미국 최대 신용협동조합인 네이비페더럴도 2022년 주택담보대출 포트폴리오가 843억 달러로 담보대출 25억 달러와 신용대출 35억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도 가계대출에서는 메가뱅크보다 지역은행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지역 금융사들이 관계형 금융을 바탕으로 예금과 대출의 순환 구조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다만 슈파르카세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슈파르카세는 지자체가 설립과 감독에 관여하는 공적 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 국내 저축은행이나 상호금융과 제도적 기반이 다르다. 신용대출 금리도 최고 연 15~17%대에 형성돼 있다. 핵심은 새 금융기관 설립 여부보다 업권별 역할 분담과 지역 금융기관의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있다는 분석이다. 2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한국도 공공 영역이나 지자체가 주도하는 금융기관을 별도로 설립하는 방안을 논의할 수는 있다”면서도 “인터넷은행 사례에서 보듯 업권 간 역할 분담이 이뤄지지 않으면 새 기관을 만든다고 해도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