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취재하면서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정착하게 된 한인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된다. A 씨도 그중 하나다. 그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온 미국에서 국적을 얻고 실리콘밸리에 남았다. 그리고 현재는 빅테크에서 활약하고 있다. 나올 때는 부모 뜻이었지만 돌아갈지 남을지는 본인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국가관이 의심을 받아야 할까.
지난달 취임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인사 청문회를 보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도 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신 총재 아버지는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지낸 신철규 씨다. 40여 년 전 기사를 찾아보면 신 전 사장은 아들이 한국인 학자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며 한국 신문의 사설을 보내줬다. 신 총재가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군 복무까지 마친 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신 총재는 기사에서 고국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신 총재는 송곳 인사 검증 과정에서 오랜 해외 생활, 배우자·장남·장녀의 외국 국적, 장녀 위장 전입, 영국 국채 대량 투자로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불렸다.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 등 이력만 놓고 보면 한국은행 수장으로 손색이 없지만 신 총재의 애국심 논란이 불거졌다. 전임자 이창용 전 총재가 나서 “(신 총재가) 가진 자산보다 애국심이 더 클 것”이라며 우려를 일축했지만 오랜 해외 생활, 가족 국적 문제로 애국심이 부족한 결격 후보자로 몰렸다. 청문회 당일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첫 한은 총재라는 기록도 얻었다. 여소야대 국회였거나 대통령 임기 후반이었다면 낙마했을지 모를 일이다.
본인이나 가족의 국적 문제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국가관이 문제’라느니, 애국심이 부족하다느니 낙인찍는 것은 자의적이다. 국가공무원법 등 법률상 외국인과 복수국적자를 임용하는 것이 불법인 것도 아니다.
자의적인 국가관 잣대로 인재를 놓친 경험을 우리는 이미 한 번 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신설된 미래창조과학부 초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종훈 전 벨연구소 사장 얘기다. 노벨상 수상자 11명을 배출한 벨연구소 최연소, 첫 외부인 사장 타이틀을 딴 김 전 사장은 한국 산업 생태계를 혁신할 인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5세 이민자’인 그의 발목을 잡은 것 역시 국가관이었다. 벨연구소 사장 자리를 포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한국 말 서툰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냉소였다. 미군 장교로 복무하고 중앙정보국(CIA) 자문 활동을 한 미국 국적자라는 사실에 성공 신화는 묻혀버렸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약속도 소용없었다. CIA에 무슨 자문을 했는지, 장관이 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제대로 된 논쟁도 없었다. 자진 사퇴한 그는 “큰일은 못 하고 왔지만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한반도 전문가인 빅터 차 현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 석좌는 당시 김 전 사장이 정치적 피해자라며 안타까워했다. 김 전 사장이 그때 장관이 됐다면 인공지능(AI) 산업 대비가 더 빨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기자만의 것인가.
미국 내 한인 수가 200만 명을 돌파했다. 세계은행(WB) 총재, 글로벌 사모펀드 대표까지 배출할 정도로 한국계 위상이 높아졌지만 한인사회와 국내 인적 교류는 제자리걸음이다. 조금 더 열린 시각을 갖는다면 우리나라 AI와 금융 산업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시민권을 포기하고서라도 공직에 봉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떤 국가관을 지녔는지 듣는 기회라도 주어지기를 바란다. A 씨도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귀국할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