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간격과 색깔의 선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을 띤다. 하지만 표면에 시간과 행위가 반복적으로 축적되면서 대상은 고정된 물질이 아닌 ‘움직이는 감각’으로 변한다. 선을 긋는 단순한 행위가 화면 위에서 시간의 층위로 확장되는 순간, 회화는 무한한 우주를 경험하게 한다.
화면 위에 무수한 선들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 지근욱(41)의 개인전 ‘금속의 날개’(Metallic Wings)가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다. 지근욱의 회화 59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선 긋기와 물질을 쌓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재현적 차원을 넘어 ‘어떻게 드러내는가’라는 본질적인 존재 방식에 집중하는 작가의 대표작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철저하게 계산된 규칙 속에서 기하학적 패턴 그리기를 반복해왔다.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손이 개입된 실제 노동이다. 같은 방식으로 선을 긋지만 같은 선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에 밑 작업을 하고, 자외선 프린터를 이용해 그라데이션을 만든 뒤 그 위에 자와 색연필을 이용해 반복적인 선 긋기로 화면을 채운다”며 “밑작업을 할 때 스테인리스 성분의 안료를 사용해 금속 느낌을 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나온 작품들은 ‘스페이스 엔진’ 연작이다. 이 중 대표작은 총 24개 회화로 구성된 ‘금속의 장’(metallic field)이다. 같은 크기의 사각형 두 개를 위아래로 배치한 뒤, 이런 구조를 12쌍 가로로 이어 붙여 구성한 작품이다. 각 작품은 화면 안쪽으로 점점 좁아지며 중첩되는 사각형 구조로 구성돼 있고, 각 면은 빽빽하게 그어진 직선들로 채워져 있다.
선들은 일정한 간격과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색과 밀도를 띠어, 가까이에서 보면 손길의 반복과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단단한 사각형 틀 안에 갇힌 듯한 구성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 틀을 이용해 ‘닫힌 우주’라는 개념을 뒤집는다.
또 5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금속의 길’(metallic paths)에서는 사선들이 화면을 채우고 그 위에 우상향하는 흰색 호가 이어져 있다. 마치 우주에서 둥근 지구를 바라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의 핵심 물질인 ‘금속(Metal)’은 과거를 응축한 시간의 결정체다. 유동적 표면을 통해 단일한 현재를 넘어선 다층적 시공간을 화면 위로 끌어올린다. 금속은 회화에 광학적 변주를 입히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빛의 각도에 따라 표면의 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보는 이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깊이와 층위를 발생시킨다.
또 ‘날개(Wing)’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중력과 질료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운동의 방향성이 담겨 있다. 견고한 금속성 물질이 집요한 반복을 통해 점차 비물질적인 영성의 영역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물질로부터 출발한 의식이 다시 비물질적 상태로 상승하는 궤적을 은유한다.
작가는 “영혼이 상승하는 이미지를 표현해 봤다”며 “관람객들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고 처음과 끝도 없는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근욱은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예술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아트&사이언스 석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로 돌아와 회화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곡미술관, 쉐마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했고, 202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 신진트랙 등에 선정됐다. 현재 숙명여대 회화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전시는 5월 9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