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면서 이제는 그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980년대 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미국 등 세계 시장에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현지 영화사 인수에 나섰던 일본처럼 한국도 세계 콘텐츠 산업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
다만 한국 콘텐츠의 현재 성장 방식은 과거 일본과 다르다. 자본을 앞세워 해외 기업을 인수하기보다 K팝과 영화·드라마가 지닌 창의성과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세계 시청자와 접점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 정체성과 창작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자본과 제작·유통 시스템을 결합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한국 콘텐츠 기업과 북미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만난 ‘프리 유녹(PRE U-KNOCK) 한인 E&M 라운드테이블’이 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빌트모어 호텔에서 열렸다. 국내 콘텐츠 기업 12곳과 넷플릭스, 파라마운트 픽처스, 라이언스게이트, 아마존 MGM 스튜디오, WME, 버선트 등에서 활동하는 한인 전문가를 포함해 북미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 약 10명이 참석했다.
이날 대담에서는 제이 킴 파라마운트 픽처스 수석부사장과 제임스 신 하이브 아메리카 영화·TV 부문 사장이 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과 과제를 논의했다. 대담의 화두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K콘텐츠가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K콘텐츠의 다음 단계는 ‘글로벌 콘텐츠’…한국적 정체성이 경쟁력
신 사장은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예능 ‘피지컬: 100’ 등을 한국 콘텐츠가 장르와 플랫폼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로 꼽았다. 그는 “이러한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며 세계 시장에서 기준을 계속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콘텐츠로 성장한다는 것이 한국적인 색깔을 지우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오히려 한국만의 이야기와 문화적 정체성, 창작의 진정성이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 콘텐츠 고유의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해외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일본의 과거 문화 확장과도 대비된다. 1980년대 후반 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스시 등 일본 음식과 문화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확산됐고, 일본 기업들은 미국 영화사 인수에도 나섰다. 반면 한국은 해외 기업 인수보다 K팝과 영화·드라마의 창의성과 스토리텔링을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성장 경로가 다르다. 결국 한국적 정체성과 창작 역량을 지키면서 글로벌 자본과 제작·유통 시스템을 결합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과제로 제시됐다.
파라마운트도 투자…K콘텐츠에 열린 할리우드 자본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한국 콘텐츠 투자 사례도 소개됐다. 킴 수석부사장은 “파라마운트가 하이브 아메리카의 영화 ‘케이팝: 더 데뷔’(K-Pop: The Debut)를 배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체 자금도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K팝 음악과 아티스트의 카메오 출연 등을 담아 한국 음악 산업과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을 결합한 프로젝트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이런 작품에 투자하는 첫 사례라고 생각한다”며 “여러분 모두 (세계 시장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작품(IP)을 갖고 있다”며 국내 콘텐츠 기업들이 보유한 지식재산(IP)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했다. 현재 파라마운트의 협력 사례는 하이브 아메리카 프로젝트에 한정돼 있지만, 한국 기업이 보유한 IP와 북미 주요 스튜디오의 협력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 사장은 “‘케이팝: 더 데뷔’는 전편을 서울에서 촬영한 작품”이라며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100% 서울에서 촬영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2018년 처음 기획된 뒤 여러 스튜디오를 거쳐 8년 만에 다시 제작 승인을 받았다”며 “2027년 2월 전 세계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IP를 단순히 미국 시장에 맞춰 각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 제작과 공동 투자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한국의 원천 IP와 창작 역량에 북미의 제작 인프라, 자본, 글로벌 배급망을 결합하면 콘텐츠의 완성도와 시장 확장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 사장은 “한국 IP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양국 기업이 서로 다른 사업 관행과 계약 구조를 이해하고, 권리 보호와 수익 배분 등 협력의 조건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한인 할리우드 리더들, 한국과 북미 콘텐츠 산업 잇는 가교
이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 콘텐츠 업계를 연결하는 한인 전문가들의 역할도 중요하게 거론됐다. 할리우드 주요 스튜디오와 에이전시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인사들은 양국 산업의 제작 환경과 사업 관행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력의 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북미 시장에 진출하려면 현지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콘텐츠 기획 단계부터 투자자와 제작사, 배급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한인 전문가들의 경험과 네트워크가 한국 기업의 현지 진출을 돕는 실질적인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AI)를 비롯한 신기술도 콘텐츠 산업의 변화를 이끌 요소로 꼽혔다. 신 사장은 AI를 창작자를 대체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작비와 시간을 줄이고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는 등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콘텐츠의 핵심인 창작과 이야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킴 수석부사장도 “AI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며 “긍정적인 활용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재무 모델을 AI에 입력해 분석했을 때 사람이 몇 시간 걸려 파악할 내용을 짧은 시간 안에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버티컬 시리즈와 버추얼 아티스트, AI 기반 콘텐츠 등 새로운 형식도 시장의 변화를 이끌 것으로 전망됐다. 다만 기술과 플랫폼이 달라져도 결국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국 콘텐츠가 축적해온 창작 역량은 여전히 중요한 경쟁력으로 꼽혔다.
글로벌 플랫폼과 국내 플랫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면 경쟁보다 차별화된 강점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신 사장은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국내 플랫폼들이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기보다 각자의 이용자와 콘텐츠 특성에 맞는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다양한 유통 경로를 확보하는 것 역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과제다.
북미 시장 이해부터 네트워크 확보까지…참가 기업들 “협력 가능성 확인”
이번 라운드테이블은 국내 기업들이 북미 시장의 투자·제작 환경을 이해하고 현지 전문가들과 직접 접촉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참석 기업들은 한인 전문가들과의 만남이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현지 시장의 시각을 파악하고 기업 간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김지현 와이엔컬처앤스페이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인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자리는 흔치 않다”며 “정부 지원을 통해 대기업이 아닌 성장 단계의 기술·엔터테인먼트 기업들도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현지 전문가들의 인사이트가 한국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달라 새로운 시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회사의 장재준 씨는 “기술기업과 IP 보유 기업이 한자리에 모여 각사가 가진 역량과 노하우를 공유할 기회가 흔치 않다”며 “이번 만남이 투자 유치뿐 아니라 기업 간 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열어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K팝 아티스트와 연계한 IP 사업을 개발하는 리코브의 박준혁 이사도 “평소 궁금했지만 물어볼 기회가 없었던 북미 콘텐츠 시장과 IP 비즈니스 관련 궁금증을 현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국내 콘텐츠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유녹(U-KNOCK)은 국내 투자자와 콘텐츠 기업을 연결해온 녹(KNOCK)의 해외 확장 프로그램이다. ‘세계로, 당신에게로 노크한다’는 취지로 2024년 시작해 올해 3회째를 맞았다. 단순한 해외 홍보를 넘어 현지 투자자와 기업을 직접 만나 사업 기회를 발굴하고 콘텐츠 금융과 글로벌 협력 기반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