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산업에 막대한 자금이 몰리면서 해외에서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담보로 한 대출과 보험 등 금융거래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반면 국내 주요 은행들은 GPU의 가치를 평가할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가 첨단산업 중심의 생산적 금융 확대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금융권의 심사 역량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5일 금융계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과 한국산업은행은 GPU를 별도 담보자산으로 취급하는 대출 상품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GPU의 담보가치를 산정하기 위한 자체 평가모형도 갖추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개발 일정 역시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기술 변화가 빠른 GPU의 경제적 수명과 중고시장 가격 등을 예측하기 어려워 기존 부동산·설비 중심의 담보평가 방식을 적용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해외에서는 이미 GPU를 활용한 대규모 자금 조달이 이뤄지고 있다. 올 8월 말 기준 외부에 공개된 GPU 담보 금융거래는 총 18건으로 약정액만 831억 달러(약 111조 5000억 원)에 이른다.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고가의 장비를 금융자산으로 활용하는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AI 클라우드 기업 코어위브다. 미국 모건스탠리와 일본 미쓰비시UFJ은행(MUFG) 등은 지난해 7월 코어위브의 26억 달러(약 3조 5000억 원) 규모 자금 조달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GPU 등 설비 구입가격의 80%를 초기 대출금 산정에 반영하고, 장비 가치가 6년에 걸쳐 감소한다는 가정을 적용했다. 대출잔액이 감가상각을 반영한 자산 가치의 85%를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기준도 마련했다.
미국 사모대출 운용사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역시 AI 인프라 관련 금융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1년간 신규 대출 규모는 3500억 달러를 웃돌아 직전 12개월보다 30% 이상 증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폴로의 대출 사업이 HSBC나 씨티그룹 등 글로벌 대형 은행과 견줄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GPU 가격 변동에 따른 금융회사의 손실 위험을 줄이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 AI 인프라 금융업체 아메리칸컴퓨트는 지난달 GPU 잔존가치보험(RVI)을 선보였다. 대출이나 리스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GPU의 실제 가치가 사전에 정한 수준을 밑돌 경우 차액을 보전하는 구조다. GPU의 가치 하락 위험을 금융회사나 리스업체가 전적으로 떠안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반면 국내 금융권의 AI 인프라 자금 공급은 여전히 대기업의 신용도와 지급보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근 KB국민은행이 글로벌 대체투자 운용사 브룩필드의 12조 6000억 원 규모 AI 인프라 공동대출 주선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브룩필드 측 특수목적법인(SPC)이 GPU를 매입해 사업자에게 임대하는 구조지만 금융기관이 대출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GPU 자체의 담보가치보다 네이버의 사용료 지급보증이었다.
보험업계 역시 관련 위험을 인수하는 데 소극적이다. 국내에서 보증보험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SGI서울보증은 GPU를 대상으로 한 신규 보증상품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GPU의 감가상각 속도와 중고시장 가격, 장비 처분 가능성 등에 관한 평가체계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AI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는 만큼 은행들이 기존의 기업 신용평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윤종문 여신금융협회 여신금융연구소 실장은 “자체 AI 서비스를 구축하려는 기업이 늘면서 관련 설비 수요도 확대될 것”이라며 “GPU 금융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GPU에 대한 담보 인정 범위와 잔존가치 측정 기준 등이 우선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