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인공지능(AI) 시대로 진화하는데 한국 사회는 극도의 혼란 속에 퇴행하는 역설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반도체 초호황에 따른 경제성장에도 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안보 상황은 불안정하며 개인의 삶도 불안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가 원로인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지난달 출간한 저서 ‘AI 국가개조론’을 서울경제신문에 보내왔다. 책에는 “제 나이 구순을 넘겨 일생 최후의 창작으로 대한민국 국가전략을 구상했다. 조국에 대한 헌사로 후대에 들려주는 유서”라는 손편지가 함께 담겼다.
그는 지난 2일 경기 성남 판교의 개인 사무실에서 본지 기자와 만나 “인류가 AI와 공존할지, 인조물의 역습으로 종말을 맞을지 갈림길에 섰다”고 진단했다. 이어 “AI가 여는 세상에서 도덕성을 지닌 인간의 가치를 되돌아보고 우월한 도덕적 리더십을 세워 초월적 AI를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차원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지도층부터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가치를 지키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성찰하고 국가 개조의 각오로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한 AI 시대 국가전략에 대해 “AI 3강과 같은 구호를 내세우기보다는 우선 ‘국가 안보’ ‘국민 안전’을 목표로 세우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AI 기술을 선택해야 한다”며 미래 식량 기술, 차세대 에너지 등의 8대 전략기술에 집중 투자할 것을 당부했다.
-최근 ‘AI 국가개조론’을 집필한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에 세 개의 큰 흐름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첫째, 한국이 직면한 도착적(뒤바뀌어 거꾸로 된) 근대화의 문제다. 한국은 1945년 이후 독립한 120~150개국 중 유일하게 정치적 민주화·다원화와 경제적 선진화를 동시에 이룬 국가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서 갈등과 불신, 사회 해체 현상이 일고 있다. 둘째,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전 세계가 (질서의) 붕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의 큰 줄기인 근대화·현대화·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다원화가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올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 가고 있다. 셋째, 인간 이성의 최고 작품인 AI라는 새로운 특이점 기술이 등장했다. AI는 지금까지의 진화적 기술 단계를 도발적·초월적·폭발적으로 뛰어넘었다. 이런 세 가지 전개 과정을 보면서 조국에 헌사를 바치는 사명감으로 책을 썼다.
-AI 발전이 문명사적 대전환을 촉발하고 있다. 향후 세계 질서는 어떻게 달라질까.
△지금의 세상을 앞선 시대의 진화적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AI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천문학적 시간이 흐른 끝에 여러 종을 거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이후 농업시대, 근대 시대, 산업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가 전개됐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진화한 인간과 자연의 2자(者) 공존 시대였다. 이제는 인간이 만든 인조물인 AI까지 더해 3자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AI가 여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이다.
-그런 변화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나.
△AI 세상에서 가장 먼저 테스트베드가 된 곳이 대한민국이다. 근대화·현대화 단계를 자연스럽게 거친 미국·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전통·근대·현대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불거졌다. 그러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AI 강국 대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은 세계 인류의 문제가 가장 잘 보이는 시험장이 됐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도 “인류 장기 미래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국은 새로운 기술과 조직이 어떻게 인류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실험실”이라고 평가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은 2045년에 인간보다 우월한 초인공지능(ASI)이 지배하는 ‘특이점 시대’가 올 것으로 예측했다. 그 시점을 2030년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됐든 특이점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문제와 특이점 시대 완성 후 발생할 초월적 사회 변화의 문제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특이점 기술 발전 과정에서 국가·사회·개인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일자리 대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실업 문제를 과거 산업 시대의 관점에서 다루면 AI 세상으로 가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AI발 고용 쇼크에 대응해 각계각층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특이점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실업 문제, 산업구조 개편에 대해 과도기적 국가정책이 있어야 한다. AI와 관련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기업 따로, 산업계 따로, 복지 따로, 재정 따로 식으로 각자의 기존 틀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AI 세상으로 가는 길을 방해할 것이다. 정부도, 국회도, 기업도, 노조도, 시민단체도 (AI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가 공동체의 자강을 목표로 서로 역할을 어떻게 조율할지 큰 그림부터 확실히 그려야 한다. 그 위에서 각자 무엇을 고칠지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런 결심 없이 백날 토론만 해 봐야 도로아미타불이다.
-AI 시대 국가 개조의 해법으로 ‘자강론’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도 글로벌 AI 3강을 목표로 소버린 AI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자강에서는 글로벌 AI 몇 강이니 하며 등수를 매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 중요한 1차적 과제는 국가 자강의 목표부터 분명히 세우는 일이다. 국가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서 AI의 여러 기술 중 어떤 기술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지 전략을 짜야 한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지만 국민 안전을 위한 식량·에너지 등 생명 자원 자립과 국가 안보 자립이라는 자강의 기준에서 미완의 나라다. 그런 차원에서 우선 ‘국민 안전’과 ‘국가 안보’를 국가 목표로 분명히 세우고 이를 달성할 8대 자강 전략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8대 기술은 자강 생존을 위한 미래 식량·차세대 에너지 기술, 자강 안보를 위한 양자·미래형 국방·사이버 및 인지전 기술, 자강 성장을 위한 소버린 AI·우주 인프라·피지컬 AI 기술이다. 특히 생명 자원 확보가 중요하다. 바이오 기술과 우주 농업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생명 자원 중에서도 에너지는 막대한 전력을 쓰는 AI 시대에 매우 중요한데.
△땅이 좁은 국내에서는 소형모듈원자로(SMR)가 상업성이 있고 실용적이다. 요즘에는 인공 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 발전으로도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핵융합 발전의 큰 애로 사항은 (핵융합로 속에서 발생하는) 플라스마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플라스마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컴퓨터 알고리즘이 아직 없다. 양자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20만 큐비트까지 향상되면 플라스마 움직임을 분석할 알고리즘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핵융합 실용화 시기에 대해서는 2030~2035년을 예상하는 시각도 있고 2040~2050년대는 돼야 한다는 전망도 있다. 그런 사업에 지속적으로 연구 재정을 투입하는 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AI 자강 전략을 위해 국가 거버넌스 체계는 어떻게 개조해야 하나.
△저는 원래 ‘과학기술자강부’를 만들자고 주장해 왔다. 과기자강부는 행정부처(ministry)가 아니라 입법·행정·사법의 3부(府)에 이은 4부의 권력기관(branch)이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국가 안보·국민 안전 정책의 입안과 재원 마련, 인력 동원, 집행까지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과기자강부가 4부로 설립되면 혼선을 키울 수 있다. 차선책으로 제2·제3 자강 총리제를 제안한다. 제2 총리는 외교·국방·통상 부문 총리로, 제3 총리는 과학기술 총리로 두는 방식이다. 기존의 총리는 내무 행정, 치안·법무, 복지·교통 등을 담당하는 제1 총리가 된다.
-우리 정치 제도를 보면 현실화되기 어려운 제언인데.
△현행 대통령제 아래에서 어렵다면 대통령·국회의장부터 공공·민간의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과학기술 자강 정책을 논의하고 자문할 수 있는 ‘옴부즈만’이라도 둘 필요가 있다. 그 조언을 과학기술 정책에 반영하도록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국가 리더십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공동체 의식의 결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전란 등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지만 위기 예방에는 실패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 조선의 멸망, 한국전쟁 등이 그러했다. 위기가 오면 그때만 모면하고 각자도생하면서 살아남는 데만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생존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원칙과 기본·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존중하는 사회가 됐다. 공인들이 입으로는 민주주의·정의를 외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공인답지 않게 행동한다. 이러니 국가 개조를 위한 국민적 각오가 뭉쳐지지 않는다. 양심 있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AI로 촉발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가 개조의) 각오를 다져야 한다.
◇He is…
1935년 경기 안성에서 출생했으나 당시 행정 착오로 호적에는 1936년생으로 기록됐다. 양정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유수 신문사들에서 언론인·경영자로 활약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아 선도기술 개발사업인 ‘과학기술 G7 프로젝트’ 등을 추진했고 이후 서울시립대 총장을 지냈다. ‘AI 국가개조론’을 비롯해 2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