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올해 누적 수출이 사상 처음 9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반도체의 견조한 흐름에 자동차·화장품 등의 호조가 더해지면서 이달 미국·중국·독일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연간 수출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할 전망이다.
1조 달러까지 700억 남았다…반도체·자동차 동반 호조
산업통상부가 1일 발표한 ‘10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올해 1~10월 누적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60.6% 증가한 9300억 달러로 잠정 집계됐다. 연간 수출 1조 달러까지 남은 금액은 700억 달러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10월에도 우리 수출이 1100억 달러 이상의 견조한 증가세를 이어가면서 11월 중 연 수출 1조 달러 달성이 확실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10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93.7% 증가한 1152억 8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두 달 연속 1100억 달러를 웃돌며 9월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월간 실적을 냈다. 조업일수를 고려한 일평균 수출도 76.1% 늘어난 52억 4000만 달러로 두 달 연속 50억 달러를 넘어섰다.
반도체 수출은 여전히 견고한 모습을 보였다. 전년 동월보다 259.4% 증가한 564억 4000만 달러로 두 달 연속 500억 달러를 웃돌았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 주도권 확보를 위한 설비투자를 이어가면서 높은 수출단가와 물량이 유지됐다.
수출 온기는 다른 품목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20대 주력 품목 중 18개의 수출이 늘었고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도 34% 증가했다. 자동차는 조업일수 증가와 하이브리드차 호조 등에 힘입어 18.1% 늘어난 65억 5000만 달러로 역대 10월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AI 데이터센터에 쓰이는 변압기·전선 수요가 늘면서 전기기기 수출도 74% 증가한 19억 9000만 달러로 월간 역대 최대를 경신했다.
10월 수입은 36% 증가한 727억 8000만 달러였다. 무역수지는 425억 달러 흑자로 두 달 연속 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재명 대통령도 1일 엑스(X)에 수출 실적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100억불 수출 축하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감격”이라고 밝혔다. 기업인과 생산현장 노동자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실용적 국익외교를 통해 경제영토를 넓히는 데 더 노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한국 수출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허물을 벗듯 산업 구조를 바꾸며 성장해왔다. 섬유·의류·가발에서 자동차·반도체로 주력 품목을 고도화했고, 이제는 AI 투자 확대와 한류를 탄 소비재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보호무역과 지정학적 불안 속에서도 변화를 거듭하며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처음 넘어선 지 62년 만에 연간 1조 달러 문턱에 선 것이다.
대미 흑자, 작년 연간의 두 배…유럽까지 넓어진 통상 전선
이제 과제는 기록적인 성과를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김 장관도 주요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불안 등으로 여전히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경계했다.
미국·중국에 이어 유럽에서도 자국 산업 보호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통상 전선은 넓어지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과 미국이 해온 조치들을 유럽연합(EU)도 도입하면서 협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많아졌다”며 “유럽은 사안별로 회원국의 입장도 달라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상대”라고 진단했다.
전체 수출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미국과의 통상협상에서는 무역흑자 급증이 부담으로 떠올랐다. 올해 1~10월 대미 무역흑자는 약 1023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흑자 495억 달러의 두 배를 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무역 불균형 시정을 내세워 한국에 25%의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한 전례가 있다. 늘어난 무역흑자가 대미 투자 사업 규모 확대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럽에서는 시장 확대의 기회와 통상 위험이 함께 커지고 있다. EU는 올해 1~10월 전체 수출의 7.8%를 차지했다. 미국·중국보다 시장 규모는 작지만 10월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56.4% 증가하며 같은 달 역대 최대를 기록하는 등 성장세가 뚜렷하다.
문제는 EU가 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 진입 조건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EU는 산업가속화법안(IAA)을 통해 정부 구매와 보조금 지원에서 유럽산 자동차·배터리 등을 우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산 제품이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지원 혜택이나 공공기관 납품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
자동차 수출 호조를 이끈 하이브리드차에도 통상 변수가 생겼다. EU가 한국산을 포함한 수입 하이브리드 신차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조사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최종 조치는 미정이지만 중국 업체들의 해외 진출로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추가 장벽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10월 수출이 22.3% 증가한 철강 역시 공급과잉 속에서 탄소 감축 부담까지 안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EU가 추진하는 저탄소 철강 조달 기준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이중 장벽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출 절반이 반도체…화장품·바이오로 성장 기반 넓혀야
AI 투자 주기에 대한 의존도도 살펴야 한다. 10월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49%에 달했다. 서버용 저장장치와 변압기·전선도 AI 데이터센터 투자 수혜를 받고 있다. 품목이 달라도 최종 수요가 같은 투자 주기에 묶여 있어 투자 둔화 때 함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은행은 10월 국회에 제출한 답변에서 미국 빅테크의 AI 투자가 둔화하면 내년 반도체 수출이 기존 전망보다 최대 1000억 달러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소날리 자인찬드라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 부국장도 아·태지역 경제전망 브리핑에서 한국이 AI 호황의 큰 수혜를 누리는 만큼 투자 사이클 변화에 대한 노출도 커졌다고 진단했다.
다행히 수출 기반을 넓힐 가능성은 여러 산업에서 확인되고 있다. 10월 화장품 수출은 미국·중국·EU 등에서 고르게 성장하며 57.5% 증가했다. 농수산식품은 면류·음료·소스류 호조로 11.6%, 바이오헬스는 바이오시밀러의 중남미 시장 확대와 의약품 위탁생산 물량 증가로 30.2% 늘었다. 세 품목 모두 역대 10월 최대 실적이다. 통상 장벽에 대응하면서 이들 산업의 성장세를 키우는 일이 수출 기반 다변화의 과제로 꼽힌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 호황은 세수 증가와 미래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지만 다른 산업과 고용으로의 파급효과는 제한적”이라며 “늘어난 세수를 수출이 부진한 산업 지원에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