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가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기 위한 ‘테라팹(Terafab)’ 건설에 속도를 내면서 삼성전자(005930) 와 SK하이닉스(000660) 의 이해득실 계산이 복잡해지고 있다. 연산을 담당하는 로직 반도체와 메모리를 함께 생산하겠다는 구상이 현실화하면 한국 기업의 대형 고객이 경쟁자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테라팹 가동 초기에는 메모리 공급과 반도체 장비 수출을 확대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머스크는 20일(현지 시간) 스페이스X 실적 발표에서 “ASML과 모든 협력업체가 장비 납기를 앞당겨준 데 감사한다”며 “2028년 3~4분기 본격 양산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내년 5~6월에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연구시설에서 시험용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다만 머스크는 일정이 매우 공격적이라며 목표 달성에 불확실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발주 여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테라팹은 테슬라의 자율주행차·휴머노이드 로봇과 스페이스X의 AI 데이터센터·우주 컴퓨팅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반도체 설계부터 로직·메모리 웨이퍼 제조, 첨단 패키징과 검사까지 한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목표다. 스페이스X는 텍사스주 그라임스카운티에 1단계 투자금으로 168억 달러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월 100만 장의 웨이퍼를 처리하는 초대형 공장으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2030년 이전에 월 10만 장 규모의 초기 생산시설을 갖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곳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테슬라와 165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위탁생산 계약을 맺고 2033년까지 차세대 AI6 칩을 공급하기로 했다. 생산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이 맡는다. 테슬라가 테라팹에서 자체 생산에 성공하면 AI6 이후 후속 제품의 위탁생산 물량이 줄어들 수 있다. 다만 이미 체결된 계약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테슬라의 반도체 수요가 자체 생산능력보다 빠르게 늘어나면 외부 위탁생산을 병행할 가능성도 크다.
자체 생산의 성패는 공정 기술 확보에 달려 있다. 테라팹에는 인텔이 참여하고 있으며 머스크는 인텔의 1.4나노급 ‘14A’ 기술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도 협의를 진행했지만 공장 운영권을 놓고 입장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머스크는 공장을 직접 운영하겠다는 방침인 반면 TSMC는 자사 기술을 적용한 공장은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산에 필요한 미세공정 기술과 안정적인 수율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사업에는 영향이 다소 늦게 나타날 전망이다. 테라팹이 메모리까지 자체 생산하면 장기적으로 외부 구매 물량이 줄고 공급업체의 가격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고대역폭메모리(HBM)는 D램 제조뿐 아니라 여러 개의 칩을 쌓아 연결하는 고난도 패키징 기술도 필요하다. 테라팹이 HBM을 언제부터 얼마나 생산할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내년 시험 생산 대상도 D램이 아닌 공정 검증용 정적램(SRAM) 회로로 알려졌다. 로직 반도체 생산이 먼저 확대될 경우 필요한 메모리는 상당 기간 외부 공급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에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릴 수 있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는 이달 미국에서 열린 반도체 전시회에서 국내 업체 다수와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대부분 평가 또는 초기 협의 단계로, 양산시설 관련 수주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관건은 테라팹의 실제 양산 시점과 수율이다.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첨단 로직·메모리 반도체를 경쟁력 있는 가격에 대량 생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른바 ‘일론 타임(Elon Time)’을 고려할 때 테라팹의 본격 양산까지 머스크가 제시한 2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론 타임은 머스크 특유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일정 제시를 풍자하는 표현이다. 머스크가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신제품 출시, 자율주행 기술 완성, 화성 이주 등의 목표를 제시할 때마다 실제 일정이 당초 발표보다 수개월에서 수년씩 늦어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생겨났다.
최근 실물이 공개된 2세대 테슬라 로드스터가 대표적이다. 당초 2020년 출시를 목표로 했지만 일정이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6년이 지난 이달에야 실물이 공개됐다. 정식 양산과 고객 인도 목표 시점은 2028년으로 제시됐다. 일각에서는 이 일정마저 ‘일론 타임’에 따라 다시 연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5일(현지 시간) 미국 텍사스주에서 열린 출시 행사에서 테슬라의 날아다니는 스포츠카 ‘로드스터’ 가 공중에서 내려와 착지하고 있다. 출처=테슬라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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