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에는 ‘한글’뿐만 아니라 ‘한글 점자’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모른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한글 점자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문자’다. 한글 점자는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1888~1963)이 ‘창제’했다.
인천 강화에서도 먼 교동도 출신으로 서울로 올라와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박두성은 처음에는 보통학교 교사일 뿐이었다. 그의 삶은 1913년 제생원(현 국립서울맹학교) 맹아부 학생들과 만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에도 점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외국 문자의 점자다. 식민지 치하에서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우리 것이 아닌 일본어 점자만 배워야 했다. 한글 보급도 미약한 상황에서 한글 점자는 언감생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글’ 또는 ‘가갸’의 보급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박두성은 별도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체계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23년 제자들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말의 자음과 모음, 숫자가 담긴 점자를 완성한 건 1926년. 그는 그해 11월 4일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는 이름으로 6개의 점(6점형)으로 된 한글 점자를 발표했다.
조선 시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완성한 ‘훈민정음’의 뜻을 이어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가 되길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이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시작됐으니 훈맹정음이 이를 이은 셈이다. 이에 따라 올해는 한글날(가갸날) 100주년이자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인 해다.
훈맹정음 100년을 맞아 6개의 점으로 이뤄진 한글 점자가 시각장애인의 배움과 삶, 그리고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꿨는지 되짚는 자리가 마련됐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 송암점자도서관이 함께 인천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선보인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 특별전을 통해서다.
전시는 엄정순 작가의 대형 촉각 미술품 ‘코 없는 코끼리 no.7’을 손으로 감상하며 시작한다. 볼 수 없다면 형태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는지, 관람객 스스로 묻게 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한 뒤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을 해 왔다.
전시는 ‘점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1부에서는 먼저 점자와 시각장애인 교육의 발상지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 점자의 역사를 소개한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는 1784년 발랑탱 아위가 파리에 세웠다. 2년 뒤 펴낸 ‘시각장애인 교육에 관한 시론’(1786)에서 그는 손으로 읽는 돌출 문자를 처음 제시했다.
이후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루이 브라유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6점식 점자를 만들었다. 전시에서는 샤를 바르비에의 12점식 점자판과 루이 브라유의 6점식 점자판, 독일·미국의 점자 자료도 함께 관람객을 맞는다.
이어 2부에서는 한글 점자의 탄생을 다룬다. 박두성이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반포’했지만 처음에는 보급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전국의 시각장애인에게 우편으로 점자 교재를 보내는 통신교육을 펼친다.
훈맹정음은 한글의 원리에 맞춰 초성·중성·종성을 구분하고, 자주 쓰는 글자는 약자로 만들어 읽고 쓰기 쉽게 설계했다. 그 중 자음과 모음은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변경 없이 사용하고 있어, 훈맹정음이 점의 수나 배치가 정교하게 설계된 글자임을 증명한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설명이다.
전시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 3점, 송암점자도서관 8점 총 국가등록문화유산 11점도 공개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시각장애인 관련 자료로는 최초로 국가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한글 점자표 ‘훈맹정음’(1926), 점자 교육 자료 ‘한글 점자 쓰는 법’, 박두성이 점자 인쇄 원판을 만들 때 쓴 족답식 제판기(1933), 박두성이 사용한 점자 타자기 등이다.
마지막 3부는 한글 점자가 문자를 넘어 시각장애인의 권리와 삶을 넓혀 온 과정을 조명한다. ‘맹인 점자 사용 공인에 관한 건’(1947), 잡지 ‘촉불’ 등 기록 자료와 함께 점자정보단말기, 독서확대기, 점자가 새겨진 생활용품까지 오늘날 점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는 문자의 특성에 맞게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모든 설명문에 점자를 병기했고, 주요 자료는 만져 볼 수 있는 촉각 모형으로 제공한다. 음성해설도 함께 운영한다. 관람 동선도 손과 발로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벽과 진열장에는 안전 손잡이와 서로 다른 촉감의 재질을 붙였다.
공간의 시작점은 곡선, 진열장은 직선으로 배치하는 규칙을 적용해 관람객이 공간을 예측할 수 있게 했다. 주제별 공간색은 명도와 채도를 조절해, 저시력자나 적록색약 등 색각 이상이 있는 관람객도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별도로 마련된 체험 공간에서는 점자책과 촉각책을 직접 읽고, 점자표를 보며 자기 이름을 점자로 써 볼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점자 도장과 색칠 활동지, 설명을 귀로 듣고 그림을 그리는 음성해설 체험도 마련했다. 에필로그에서는 실제 점자판과 점필로 관람 소감을 점자로 남길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주관한 김명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관장은 “훈맹정음은 6개의 점으로 시각장애인에게 읽고 쓸 권리를 돌려준 문자”라며 “누구나 손끝과 귀로도 문자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2027년 2월 14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