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신청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8일 경제부처 관료들 사이에서는 “설마설마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 대통령 지시를 표면적으로만 해석하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자’는 신중론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입 문제를 다시 공론화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판단 때문이다. 전직 경제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이 정도 메시지가 나오면 가입 동력은 사실상 상실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절차적 측면에서 보면 남은 시간이 촉박한 것도 사실이다. CPTPP에 가입을 공식 신청하려면 가입국 통상 장관들이 모두 모이는 연례 회의에 가입 의사를 타진해야 한다. 올해 CPTPP 가입국 각료급 회의는 11월 23~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늦어도 정부가 CPTPP 가입을 위한 국내법적 절차를 11월 중순까지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성격을 띠는 CPTPP에 가입하려면 국내법적 절차도 복잡하다는 점이다. 우선 통상조약법 9조에 의거해 정부는 무역협정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이후 이해관계자와 전문가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해야 한다. 공청회와 관련된 관계법에 따르면 공청회 일정과 안건은 최소 2주 전 관보 등을 활용해 고지해야 한다. 이후 수렴한 의견을 바탕으로 협상 목표와 일정·쟁점 등을 담은 통상 체결 계획을 수립한 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관련 내용을 보고해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모두 준수하려면 늦어도 이달 중순에는 공청회 일정을 관보에 게시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내부 의견이었다.
재계에서는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 CPTPP의 경제적 효과가 크다는 데 있어서는 이미 학계에서도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CPTPP 가입 10년 뒤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0.38%포인트 더 상승할 것으로 전망됐다. 제조업 품목의 전후방 연관 산업에서 발생하는 생산 유발 효과는 협정 발효 후 15년간 연평균 6조 3000억~6조 7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중 중소기업이 누리는 생산 증가분만 1조 1000억~1조 2000억 원이다.
반면 CPTPP 가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농림수산업 생산액 감소분은 15년간 연평균 8523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농업·임업·수산업 분야의 감소분은 각각 7100억 원, 606억 원, 817억 원이었다. CPTPP 가입에 따른 제조업 분야의 성장 폭이 농림수산 산업 피해의 7.9배에 달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제조업 분야의 파급효과는 증감을 모두 고려한 순효과인 데 비해 농수산 분야의 피해는 수입 대체로 인한 감소만 측정했다. 시장 개방에 따라 K푸드 수출이 늘어나는 효과까지 고려하면 농수산 부문의 피해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업계 관계자는 “한미 FTA 당시에도 소고기 농가가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한우 고급화 전략에 성공했지 않느냐”며 “이번에도 국민들은 저렴한 농수산물에 접근하고 국내 농축수산업은 고도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효과의 손익계산을 떠나 기존의 통상 규범이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CPTPP가 중견국 중심의 통상 질서 회복을 논의하는 장으로 격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루빨리 가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기존 다자주의 무역 질서가 퇴조하는 상황에서 소(小)다자주의 무역 협상 체제로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며 “CPTPP는 그런 기능을 하기에 좋은 체제”라고 설명했다. 실제 CPTPP는 당초 태평양 연안 국가를 대상으로 가입국을 모집했지만 2024년에는 영국이 가입하는가 하면 아랍에미리트(UAE), 우크라이나, 우루과이와 같이 태평양에 접하지 않는 나라들도 가입을 신청하는 등 글로벌 중견국 클럽으로 발전하고 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가입이 까다로워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CPTPP는 가입국 전체가 동의해야 문을 열어주는 구조여서다. 지금도 12개 국가와 관세 양허 조건을 협상한 뒤 동의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은 최근 CPTPP 사무국 유치를 추진하면서 CPTPP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는 상황”이라며 “CPTPP 가입 문제에서도 지금이 일본과 협의를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적기”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