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향후 10년간 재정과 정책금융을 합쳐 1000조 원 규모의 자금을 녹색대전환에 투입한다. 탄소 배출이 많은 철강·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체질을 바꾸고 전기차·배터리·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녹색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7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 국민보고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K-GX 전략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는 환경과 성장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남을 뒤따르던 추격자 관행에서 벗어나 이제는 우리가 직접 판을 짜는 녹색시장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형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등 관계부처 인사와 민관합동 K-GX 추진단 민간협의체장을 맡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한화큐셀·포스코홀딩스·LG전자·삼성전자 등 참여 기업 관계자와 전문가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정부는 2035년까지 재정 200조 원과 산업은행·기업은행 등 5대 정책금융기관의 대출·보증을 통한 기후금융 790조 원 이상을 녹색전환에 투입하기로 했다. 기후대응기금도 올해 2조 6000억 원에서 내년 7조 6000억 원으로 확대한다. 또 2027년 상반기까지 녹색국채 발행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뒤 2028년 첫 발행할 계획이다.
산업 부문에서는 철강·석유화학·정유·시멘트·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탄소 다배출 5대 업종의 생산 공정을 탈탄소 방식으로 전환한다. 전기차·배터리·태양광·풍력·SMR·전력반도체 등은 ‘10대 녹색산업’으로 선정해 집중 육성한다. 태양광·풍력·2차전지 주요 품목에는 국내생산세액공제를 도입하고 SMR의 국가전략기술 지정도 추진한다.
민간도 포스코홀딩스의 수소환원제철과 한화큐셀의 차세대 태양전지, 삼성전자·LG전자의 주거공간 GX 등을 포함해 약 220조 원 규모의 ‘K-GX 시그니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최 회장은 “정부가 계획을 세우고 기업이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간이 함께 설계한 전략”이라며 “기업도 220조 원의 투자를 차질 없이 실행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GX에 100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붓기로 한 것은 기후변화 대응이 향후 미래 성장 산업이 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1970년대 국가 주도 중화학공업 정책, 1990년대 정보화 정책으로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했듯 앞으로는 인공지능(AI) 대전환과 GX가 성장의 양대 축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손정락 한국과학기술원(KAIST) 녹색성장지속가능대학원 교수는 7일 “AI는 먹고사는 문제를, GX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죽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죽고사는 문제를 먹고사는 문제로 전환하는 것이 K-GX의 지향점”이라고 설명했다.
보고대회에 나선 장관들도 K-GX의 전략적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이제 자연은 더 이상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주체”라며 “생존을 위해 전력·산업·수송·건물 등 모든 공간에서 탄소를 배출하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대안 산업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문별로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에 맞춰 감축 계획을 이행하면서 수소환원제철, 탠덤셀 태양광 모듈, 전고체 배터리, SMR, 전력기기, 히트펌프와 같은 미래 산업을 육성해 생활·산업 전반에서 탈탄소를 실천하자는 이야기다.
우선 정부는 철강과 정유·석유화학과 같은 탄소 다배출 사업에 투자를 집중한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수소환원제철을 본격 추진해 2030년에 30만 톤 규모의 실증 기술을 확보하고 2035년에는 250만 톤 규모로 생산능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또 고급 전기로강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R&D)도 시작해 2035년에는 350만 톤의 철강을 전기로에서 생산한다. 이를 통해 2050년에는 철강 생산 전체를 무탄소 기반으로 전환하는 것이 목적이다.
수소환원제철 등에 필요한 수소를 공급하기 위한 인프라도 구축한다. 정부가 나서 재생에너지와 연계한 50㎿(메가와트)급 이상 대규모 수전해 설비를 구축하고 원전과 연계한 10㎿ 규모 핑크수소 수전해 설비도 실증하는 식이다. 여기에 더해 배관망과 생산·활용 설비를 국산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를 통해 현재 연간 100만 톤 정도인 국내 청정수소 생산능력을 2035년에는 연간 1억 5000만 톤으로 대폭 향상한다.
석유화학도 전기화에 주력한다. 석유화학 기업은 정유사가 생산한 나프타를 분해설비(NCC)에 투입해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에틸렌·프로필렌은 물론 합성고무와 스티로폼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NCC를 데우는 데는 지금 액화천연가스(LNG)가 쓰이는데 이를 전기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2037년까지 대규모 실증을 마친 뒤 2040년부터는 상용화에 돌입하는 것이 기후부의 계획이다.
정유 업계는 지속가능항공유(SAF)의 혼합 비율을 2030년 최대 5%, 2035년 최대 10%까지 높여 미래 항공유 시장을 주도한다. 시멘트 업계 역시 탄소 배출이 적은 혼합시멘트 생산 비율을 현재 16%에서 2035년 40%로 개선할 방침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식각·증착 공정 과정에 사용되는 가스 중 온실효과가 높은 물질들을 새로운 물질로 대체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한다.
정부는 기후 대응과 함께 각광을 받게 될 산업군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현재 글로벌 점유율 3.8%로 8위인 전기차는 원가 절감과 핵심 기술 국산화를 바탕으로 2035년께 글로벌 점유율을 8%까지 확대해 3위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국내 수요를 높이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을 개편하는 것은 물론 배터리 리스제 도입도 추진한다.
다만 자동차 업계가 요구해왔던 전기차에 대한 생산세액공제는 이번에도 제외됐다. 정부는 국내에서 생산·판매 물량에 따라 소득세나 법인세를 면제하는 ‘한국형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2036년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원 사업에 반도체·2차전지·태양광·풍력 기자재는 포함됐지만 전기차는 내년도 세법개정안에 이어 이번에도 제외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배터리에만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전기차 업계가 중국의 공세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중국산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배터리는 전고체와 함께 나트륨 등 비리튬 배터리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역전을 시도할 방침이다. 국내에서는 송배전망 에너지저장장치(ESS) 및 중앙계약시장 물량을 중심으로 배터리 수요를 늘려 업계 숨통을 틔운다. 기업들은 전기차를 넘어 국방·로봇·선박용 배터리셀을 개발해 피지컬 AI 시대에도 대비한다. 태양광 산업에서는 발전 효율이 높은 탠덤셀을 2028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양산하고 풍력은 20㎿ 이상 대형 터빈을 독자 개발해 차세대 재생에너지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인다.
SMR은 현재 개발 중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을 예정대로 2035년께 건설 완료하고 비경수로형 SMR 상용화를 위해 개발 초기부터 민간이 참여하는 대형 R&D 사업을 추진한다. 2030년대부터 SMR 기자재 주문이 급증할 것을 대비해 동남권에는 SMR 파운드리를 구축해 제조 역량도 개선한다. 기후부 관계자는 “SMR 시장은 2024년 50억 달러 미만이었지만 2030년에는 250억 달러로 급성장할 것”이라며 “2035년 중국을 제외한 SMR 시장을 40% 차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GX과 지역균형발전도 연계한다. 나주에는 에너지특화도시를 만들어 에너지 관련 산업을 집적한다. 제주는 신규차를 100% 전기차로 공급하고 히트펌프 보급을 늘려 2035년에는 탄소중립을 달성할 계획이다. 또 국토 전반의 탄소배출을 효율화하기 위해 제주뿐 아니라 충남 당진, 보령과 서울 노원구를 ‘탄소중립 선도도시’로 지정해 권역별 넷제로 모델을 발굴한다. 노후 공공건물의 그린 리모델링도 2026년 150동에서 2030년 1230동으로 크게 늘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