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에서 볼 법한 컨테이너가 내륙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 컨테이너 여러 개가 줄지어 배치된다. 컨테이너 안에는 수출입 물품 대신 각종 칩, 전선으로 채워진 랙들이 자리해 있다. 최근 인공지능(AI) 시장에서 급부상한 대표적인 ‘모듈형 데이터센터’의 모습이다. AI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반 데이터센터보다 빠르게 완공돼 가동하는 모듈형 데이터센터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담보로 한 파이낸싱까지 등장해, 그간 건축물로서 담보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던 모듈형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자금 조달에도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블록 조립하듯 데이터센터 구축
모듈형 데이터센터란 표준화된 구성 요소인 모듈을 활용해 조립식으로 구축하는 데이터센터를 뜻한다. 일반 데이터센터가 부지에 건물부터 짓고 그 안에 서버, 랙, 냉각시설 등을 투입하는 것과 달리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이 요소들을 블록처럼 조립해 완성하는 게 특징이다. 최근에 새롭게 나온 유형 같지만 10여 년 전부터 있었다. 국내에서는 LG CNS가 2011년 부산에서 기존 데이터센터 옆에 컨테이너 한 대로 시범 구축했다. 채민영 LG CNS 데이터센터사업단장은 “당시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개념검증(PoC)으로 도입해 시장에 확산되지 않았다”며 “최근 들어 GPU도 있고 서버도 구했는데 이를 둘 ‘집’이 없게 되면서 모듈형 데이터센터가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듈형 데이터센터의 구체적인 유형이 시장에 정립된 건 없지만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가장 흔한 형태가 바로 컨테이너형이다. 컨테이너형 내에서도 한 컨테이너 안에 모든 장비, 시설들이 다 들어가는 ‘올인원 타입’과 컨테이너마다 전산, 발전 등 기능을 나눠 4개가량 설치하는 식인 옥외형으로 나뉜다. 대형 건물 프레임을 지어놓고 각 장비를 모듈로 투입, 설치하는 ‘스키드 타입’도 모듈형 데이터센터로 분류된다. 이 방식은 외벽에 블록처럼 쌓아서 데이터센터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주로 중국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옥내형’은 공장 등과 같은 기존 건물 내부에 모듈을 설치하는 유형을 의미한다. 폐업한 공장 등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는 게 특징이다.
다양한 유형의 모듈형 데이터센터가 주목받게 된 것은 AI 학습·추론 목적으로 데이터센터를 사용하려는 수요가 껑충 뛴 반면 실제 공급은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박재우 KT클라우드 DC사업담당 상무는 “과거에는 데이터센터를 기획, 설계, 구축해 운영단계로 넘어가는 데까지 3~5년 걸렸다”면서 “이를 1~2년 내에 동일한 품질로 조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다 보니 모듈형 데이터센터, 특히 컨테이너형이 등장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컨테이너형은 문제가 생겨도 피해가 제한적인 편이다. 지난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와 같이 일반 건물 형태의 데이터센터는 일부분에서 화재가 나면 건물 전체가 영향을 받아 작동이 중단될 수 있다.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한 모듈에 누수, 화재가 나도 그 모듈에만 장애가 발생할 뿐, 다른 모듈로 확산될 가능성이 낮다.
GPU 신제품 맞춰 냉각시설 반영
모듈형 데이터센터가 최근 주목받는 데 상대적으로 짧은 공사기간 때문만은 아니다. GPU 신제품 출시 간격이 짧아진 점도 모듈형 데이터센터의 높은 수요로 이어졌다.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는 GPU 성능을 반영해 최적의 데이터센터를 설계·구축하기 위해서다. 일반 데이터센터는 이미 출시된 GPU 제품을 기반으로 하는 탓에 신제품이 출시돼도 이를 데이터센터에서 최대한 성능으로 작동시키기 어렵다. 기존 데이터센터의 전력·냉각 인프라가 최신 AI GPU가 요구하는 고밀도 전력과 발열을 감당하는 데 제한적인 탓이다. 박 상무는 “랙당 전력밀도가 10년 전만 해도 10~20㎾였다면 지금은 140~220㎾로 10배 이상 높아졌다”며 “랙 수 자체에는 변화가 없더라도 늘어난 전력을 뒷받침하는 냉각, 발전기 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모듈형 데이터센터에서는 냉각시설로 수랭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지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박정국 엘리스그룹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물로 열을 식힌다는 가정 자체가 없을 때 지어진 기존 데이터센터에는 하부에 전선들을 배치했고, 이후에 누수 위험에도 물 배관을 상부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며 “반면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처음부터 수랭식 냉각 시설을 반영해 전선을 상부에, 물 배관을 하부에 설계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옥외에 놓인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외부에 노출돼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데이터센터와 다르다. 데이터센터 문만 열면 바로 외부와 접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랙 등 장비 사이에 각종 필터 장치를 추가로 두는 이유다. 채 단장은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세밀한 공간 설계를 해야 하는 게 가장 핵심”이라며 “데이터센터에 투입되는 GPU가 베라루빈으로 갈수록 층고가 높아져야 하는 동시에 수냉을 위한 파이프배관 등 각종 장비들도 더 무거워지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내년이 모듈형 상용화 변곡점
대기업 계열 시스템통합(SI) 회사들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기업들이 모듈형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이다. LG CNS는 블랙웰을 기반으로 모듈형 데이터센터 2.0을 설계·구축하고 있다. 향후 베라루빈, 파인만을 기반으로 모듈형 데이터센터를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회사의 모듈형 데이터센터 2.0은 부산 데이터센터 부지에 컨테이너형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이르면 연내 완공된다.
KT클라우드는 군산에 2028년 초 완공을 목표로 대규모 모듈형 데이터센터 구축 작업에 착수했다. 회사는 사계절이 있는 환경을 고려해 야외에 컨테이너 형태로 구축하기보다는 건물 뼈대를 만들고 모듈로 조립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엘리스그룹은 현재 전국에 컨테이너 형태의 모듈형 데이터센터 10기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이 추진하는 GPU 서버확충 및 GPU 통합운영환경구축 사업의 참여 기업으로 선정돼 B300 최적화 모듈형 AI 데이터센터를 구축·운영할 계획이다.
최근 금융 시장에서 ‘GPU 담보대출’이 등장한 점도 모듈형 데이터센터의 확산에 긍정적인 변수로 지목된다. 엔비디아는 지난달 아폴로·블랙록·블랙스톤·브룩필드·골드만삭스·KKR 등 6개 금융회사와 5000억 달러 이상의 민간 자금을 조성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고객사가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GPU를 구매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주는 사업인데 이때 GPU가 담보 역할을 맡는다. 이에 따라 그간 컨테이너가 현행법상 건축물처럼 담보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던 모듈형 데이터센터도 이제는 GPU를 담보로 활용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이 같은 기술적 요건, 시장 변화 등을 고려해 내년이 모듈형 데이터센터 본격 확산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종 모듈형 데이터센터가 국내에 설치되고 운영되면서 기술적 노하우, 레퍼런스가 쌓일 시점이라는 이유에서다. 박 상무는 “모듈형 데이터센터를 구축한 뒤 실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 수준을 장애 없이 제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안정적 운영에 대한 검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CTO는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구축부터 운영까지 턴키로 가능할지 문의가 들어온다”며 “AI 시장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칩이 나왔을 때 이를 위한 데이터센터를 설계 검증하는 과정에서 모듈형 데이터센터를 많이 찾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