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소송이 제도권 안에서 벌어지는 샅바 싸움이라면 법 테두리 밖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을 위협하는 것은 기술 유출 범죄다. 특허로 등록하지 않은 영업비밀 등 핵심 기술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국내 기업의 첨단 반도체 기술을 해외로 반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7월 말까지 경찰이 적발한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은 49건이다. 이 가운데 19건(38.8%)이 해외 반출을 시도한 사건이었다. 같은 기간 적발된 해외 기술 유출 사건 중 반도체 분야는 디스플레이(27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지식재산처 산하 기관으로 국내외 지식재산 침해를 감시하는 한국지식재산보호원도 반도체 해외 기술 유출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신상곤 한국지식재산보호원장은 6일 서울 강남구 한국지식재산센터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최근 해외 기술 유출 동향에 대해 “인력 빼가기, 적대적 인수합병(M&A), 2~3차 협력사를 통한 기술 탈취 등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 원장은 반도체 분야에서 대기업보다 중견·중소기업을 노린 기술 유출 시도가 더 위험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영업비밀 관리와 보안 체계가 갖춰진 대기업에는 기술 반출 시도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자 산업스파이들은 관리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중견·중소기업을 파고들어 원청 기업의 기술 정보를 빼내려 한다. 신 원장은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모든 기술을 독자적으로 운용하기는 어렵다”며 “산업스파이가 2~3차 협력사의 빈틈을 노리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보호원은 중견·중소기업이 기술 유출에 취약한 이유로 △보안 예산·인력 부족 △영업비밀의 법적 요건인 ‘비밀 관리성’ 미충족 △핵심 연구원의 잦은 이직·퇴직 등을 꼽는다. 이 요인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보안 투자가 부족하니 영업비밀 관리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이런 환경에서 회사를 떠난 기술 인력은 영업비밀로 인식하지 않았던 정보를 쉽게 흘리게 된다.
신 원장은 “임직원의 이직·퇴직 자체는 막을 수 없지만 이들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영업비밀을 지키게 하려면 재직 중에 보안 교육을 충분히 해야 한다”면서도 “많은 중소기업이 영업비밀 관리 개념이 약하다”고 짚었다. 이어 “아직도 일부 중소기업에서는 e메일이나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이용한 원초적인 기술 유출 사례가 나오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보호원은 기업의 기술 유출 방지 역량을 높이기 위해 영업비밀·기술 보호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다. 중견·중소기업의 기술 보호 관리 현황을 진단하고 관리 체계 구축을 돕는 사업으로 중소기업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신 원장은 “올해 말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영업비밀 관리 시범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며 “AI가 영업비밀 문서 등급을 자동으로 분류하는 등 중견·중소기업이 더 편리하게 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 원장은 중견·중소기업의 기술 유출 피해를 막을 궁극적인 해법으로 최고경영자(CEO)의 인식 전환을 꼽았다. 그는 “기술 유출 범죄 대상이 2차, 3차, 4차 협력 업체까지 확대되고 있다”며 “피해는 중소기업 한 곳의 기술 노출에 그치지 않고 산업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영업비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영업비밀 보호에 신경 쓰지 못했던 중소기업도 대표가 직접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며 “작은 구멍이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