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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 없던 주부 납치·살해해 ‘트렁크’에 싣고 다닌 남자…주머니선 ‘살생부’ 나왔다

20.09.2026 1분 읽기

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 <편집자주>

“난 잘못한 게 없다. 더 살아야 한다.”

11년 전 오늘인 2015년 9월 20일, 경찰은 한 달 가까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트렁크 시신’ 사건의 전말을 발표했다.

애초 원한에 의한 살인, 이어 강도살인으로 수사 방향이 바뀌었던 이 사건은 실상 도로 위 사소한 시비에서 자란 복수심이 낳은 비극이었다.

죄 없는 30대 여성이 목숨을 잃었고, 그 뒤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원망을 주체하지 못한 전과 22범 김일곤(당시 48세)이 있었다.

벌금 50만원에 앙심…28명 적은 ‘살생부’까지

발단은 그해 5월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벌어진 오토바이 접촉사고였다. 20대 남성 A씨와 몸싸움을 벌인 김일곤은 정작 자신만 벌금 5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자 억울함을 곱씹었다.

재판장에게 탄원서까지 여러 번 보내며 처분에 불복한 그는 이후 석 달간 일곱 차례나 A씨가 일하던 노래주점을 찾아가 벌금을 대신 갚으라며 시비를 걸었다. 흉기까지 들이밀었지만 A씨가 오히려 당당히 맞서자 김일곤은 그 자리에서 달아나는 굴욕만 겪었다.

거듭된 다툼 속에 그의 분노는 A씨 한 사람을 넘어 세상 전체로 번져갔다. 6월 들어서는 1992년부터 자신을 괴롭혔다고 여긴 이들의 명단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명단에는 의사와 형사, 판사까지 28명의 이름이 올랐다.

힘으로 A씨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본 김일곤은 아무 여성이나 납치해 ‘노래주점 도우미로 일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게 해 A씨를 유인할 계획을 세웠다. 8월 24일, 김일곤은 경기 고양시 한 대형마트에서 첫 범행을 시도했으나 납치된 여성이 차 문을 열고 달아나며 무산됐다.

복수 대상 대신 납치된 35세 여성…끝내 살해

보름 뒤인 9월 9일 오후, 김일곤은 충남 아산의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장을 보고 나오던 주모(당시 35세)씨를 흉기로 위협해 차량째 납치했다.

주씨는 천안 인근에서 화장실에 가겠다며 차에서 내려 달아나려 했지만 김일곤에게 다시 붙잡혔다. 김일곤은 차에 다시 태운 주씨의 저항이 거세지자 강원도 원주 부근 국도에서 끝내 목을 졸라 살해했다.

미끼가 사라지며 A씨를 향한 복수는 물거품이 됐고, 애먼 화풀이는 고스란히 주씨의 시신으로 향했다. 이튿날 강원 삼척에서 시신 일부를 훼손한 그는 울산까지 내려가 다른 차량의 번호판을 훔쳐 달기도 했다.

9월 11일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접촉사고를 낸 김일곤은 성동구 홍익동의 한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 불을 지른 뒤 사라졌다. 소방 당국이 불을 끄는 과정에서 시신이 드러나며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 탓에 처음엔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됐으나, 차량에 남은 지문이 김일곤을 지목하며 수사는 강도살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일곤은 전과 22범이었지만, 2013년 출소 당시 교정 당국이 경찰에 통보하지 않아 우범자 관리 대상에서도 빠져 있었다. 경찰은 9월 14일 현상금 1000만원을 걸고 공개수배에 나섰다.

8일간 도주 끝 체포…마지막까지 반성은 없었다

도주 기간 내내 그는 휴대전화와 카드 대신 현금만 썼고, 가발과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대중교통과 도보로 움직였다. 그러다 9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성동구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서 안락사 약물을 요구하며 흉기를 휘두르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에게 붙잡혔다.

체포 당시 주머니에서는 28명의 이름이 적힌 이른바 ‘살생부’가 나와 충격을 안겼다. 그런데도 그는 “난 잘못한 게 없다. 더 살아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닷새 뒤인 9월 20일, 경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 사건이 강도살인이 아니라 치밀하게 짜인 복수극이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이후 사이코패스 진단(PCL-R)에서 김일곤은 40점 만점에 33점을 받았다.

재판에서도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변호인 접견마저 거부한 채 “차라리 사형을 선고하라”며 소란을 피웠고, 유족은 법정에서 “김일곤이 너무 당당하다”며 엄벌을 호소했다.

2016년 6월 1심 재판부는 “생명을 박탈하기보다 평생 참회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사형 대신 무기징역과 30년간 전자발찌 부착을 명령했다.

그해 8월 항소심 재판부도 “불특정 다수를 노려 사회 불안을 키웠다”고 지적하며 원심을 유지했고, 양측 모두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사소한 시비에서 자란 뒤틀린 분노가 애먼 목숨을 앗아간 지 11년, 마트 주차장엔 비상벨과 폐쇄회로(CC)TV가 늘었지만 우범자 관리의 허점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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