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베일을 벗었다. 8년 만의 복귀작이다. 영화는 계급 갈등을 넘어선다. 초자본 시대의 극단적 격차를 다룬다. 그 속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파고든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부부가 있다. 대기업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노동자 부부와 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으려는 감독 부부다. 이창동은 네 사람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그리려 했다. 추상적 설명은 피했다. 대신 일상의 숨결에 문제를 스며들게 했다.
감독은 오늘날의 격차를 이렇게 표현했다. 더 이상 ‘아래위층’의 차이가 아니다. ‘대기권과 성층권’만큼 떨어져 있다. 자본은 기술과 결합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상의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배우들의 작업 방식도 화제다. 감독은 이렇게 주문했다. “연기하지 마라.” “표현하지 마라.” “준비해오지 마라.” 설경구, 전도연, 조인성, 조여정은 빈 마음으로 현장에 들어갔다. 각자의 실제 감정을 장면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캐릭터를 살아냈다.
전도연은 ‘밀양’ 이후 다시 이창동과 만났다. 그녀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즐기자는 마음으로 미옥이 되었다”고 밝혔다. 설경구가 연기한 해고 노동자 호석은 말이 적다. 대신 침묵과 시선으로 패배감과 죄책감, 가족 내 위태로운 위치를 드러낸다. 한국 남성성의 보편적 초상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든다.
사랑은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드러낼 뿐인가. 감독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미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 개인의 자유를 향한 의지”만이 그 거대한 힘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영화 속 예지(조여정 분)의 고민은 감독 자신의 고민이기도 하다. “너는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 너와 저 사람들은 결코 같지 않다”는 남편 상우(조인성 분)의 냉소처럼, 타인의 삶을 영화로 옮기는 행위 자체의 정직함과 한계를 감독은 정면으로 마주한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감독의 말처럼, ‘가능한 사랑’은 개인과 사회의 기억을 다시 쓰는 시도다. 초자본의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독이 지켜야 할 자유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화려한 스펙터클 대신 일상의 균열을 응시하며, 관객에게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를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던지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이 오랜 시간 끝에 내놓은 이 이야기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로 가능한 사랑의 형태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이 감독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건 인간학적 시선이다.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상처받는지 관찰한다. 어떻게 욕망하고 견디는지도 살핀다. 때로 품위를 지켜내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다. 판단보다 이해를, 구원보다 존재 자체를 앞세운다.
선악을 쉽게 나누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예지와 상우의 부유한 세계는 단순한 악이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노동자를 사랑하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타인의 고통을 소재로 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이 모순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타인의 삶을 이야기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이 오랜 질문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장치를 통해 선명해진다.
카메라는 거리를 유지한다. 긴 호흡의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과잉 없는 미장센이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이 스스로 느끼도록 기다린다. 그렇게 감독은 “인간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상처 속에서도 존엄과 연결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는 믿음을 굳건히 보인다. 그러나 이 믿음은 낙관이 아니라 철저한 관찰과 자기성찰 위에서만 가능하다. ‘가능한 사랑’은 그 시선이 가장 성숙하고 복잡한 형태로 드러난 작품이다. 계급과 욕망, 재현의 윤리, 사랑의 가능성을 모두 아우르며, 이창동 감독은 다시 한번 묻는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능한 사랑은 무엇인가.”
/하은선 골든글로브 재단(GGF)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