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가 연체 기록을 지워주는 신용 사면을 단행했지만 이 중 15% 넘는 차주가 다시 연체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별도 기금을 만들어 부채를 탕감해주는 것은 해외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인 만큼 중장기적으로는 금융사 자체 프로그램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금융계에 따르면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1년 3개월간 금융 분야에서 적극적인 부채 탕감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정부 출범 보름 만이었던 지난해 6월 19일에는 장기 연체자들의 빚을 소각해주는 새도약기금을 신설했고 같은 해 8월에는 서민·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신용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계좌나 카드를 개설하지 못하는 장기 연체자들의 빚을 과감하게 정리해줘 정상적 납세자로 복귀를 돕는 것이 국가 전체적 효용이 더 크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수천억 원 규모의 금융권 출연금과 재정이 투입된 사업이지만 실효성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NICE평가정보와 한국평가데이터(KODATA)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신용회복 지원을 받은 개인·개인사업자 292만 8000명 중 48만 3000명(16.5%)은 올해 1분기 중 다시 신규 연체가 발생했다. 지난해 4분기 연체 기록이 삭제된 이들 6명 중 1명은 빚을 또 제때 갚지 못했다는 뜻이다. 특히 신용 사면을 받은 개인 257만 2000명 중 45만 6000명(17.7%)이 다시 연체에 빠져 개인사업자(7.6%)보다 재연체 비중이 높았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직접 기금을 조성해 개인 채무자들의 채권 소각, 채무 조정을 해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회적 이슈가 워낙 컸던 배경이 있었고 새도약기금처럼 개인의 빚을 일괄적으로 탕감해주는 정책은 흔하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의 채권 추심 업무가 대부업권에 맡겨진 것을 계기로 한국의 추심 문화가 유독 가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작용과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면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금융회사가 자체 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분석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요국은 민간 중심의 채무 조정이 활성화돼 있으며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는 경우는 있지만 정부가 이를 소각하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며 “신용 시스템을 생각하면 현 부채 탕감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회도 유사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6월 말 발간한 ‘금융취약계층 지원 채무조정제도 운영 평가’ 보고서를 통해 “새출발기금·새도약기금 등의 특별 채무 조정이 빈번해질수록 ‘빚을 안 갚아도 정부가 해결해 준다’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금융회사가 선제적인 연체 채권 관리를 강화하고 자체적인 채무 조정제도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