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12년 만에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따른 수출가격 급등과 원화 강세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반도체 가격이 뛰면서 같은 양의 수출로 더 많은 수입품을 살 수 있는 교역조건이 개선됐고,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달러로 환산한 국민소득도 늘었다. 다만 수출가격을 중심으로 국민소득이 급증한 만큼 이를 잠재성장률 상승으로 연결하지 못할 경우 소득이 다시 정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민들의 구매력을 보여주는 실질 GNI는 2분기 전분기 대비 3.1% 증가했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0.6%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5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전년 동기 대비로는 15.6% 증가해 1988년 4분기(15.7%)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GNI가 GDP보다 빠르게 증가한 것은 교역조건 개선의 영향이 컸다.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뿐 아니라 수출품 가격과 수입품 가격의 상대적인 변화가 국민의 실질 구매력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지능(AI) 투자 확산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수출가격이 크게 오르자 수출가격 상승률이 수입가격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같은 수출 물량으로 더 많은 수입품을 살 수 있게 되면서 국민 전체의 실질소득이 늘어난 셈이다.
올해 1인당 GNI가 사상 처음 4만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것도 이 같은 소득 증가와 원화 강세가 겹친 결과다. 당초 2028년께로 예상됐던 ‘1인당 GNI 4만 달러 시대’가 약 2년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국제 순위에서도 반전이 예상된다. 한국은 지난해 1인당 GNI에서 일본에 역전당했지만 올해는 원화 강세와 소득 증가가 겹치면서 다시 일본을 앞설 가능성이 있다. 다만 올해 실질 GDP가 10%를 웃도는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대만은 이미 지난해 1인당 GNI가 4만 달러를 넘어선 데다 올해도 높은 성장률이 예상돼 한국이 대만을 추월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이번 소득 증가가 경제 전반의 체질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2분기 명목 GDP는 전년 동기 대비 26.4% 급증했지만, 국내 내수 부문의 가격 상승을 보여주는 내수 디플레이터 상승률은 3.6%에 그쳤다. 수출 디플레이터 상승폭의 16분의 1 수준이다. 국내 물가가 전반적으로 크게 오른 것이 아니라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가격이 급등하면서 명목 성장률을 끌어올렸다는 의미다.
수출 호황의 과실이 가계로 확산되는 속도도 아직 더디다. 2분기 민간소비는 전분기 대비 0.4% 증가하는 데 그쳤고 정부소비도 0.1% 늘어나는 데 머물렀다.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의 증가폭에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2분기 총영업잉여는 전분기 대비 18.5% 증가해 관련 통계가 공표되기 시작한 2010년 2분기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반면 가계의 주요 소득원인 피용자보수는 1.9%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도체를 비롯한 수출기업의 실적 개선이 기업소득을 빠르게 끌어올렸지만, 아직 임금과 소비 등 가계 부문으로 충분히 확산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소득이 소비와 투자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저축과 투자 사이의 간극도 커졌다. 2분기 총저축률은 45.6%로 전분기보다 3.9%포인트 상승해 1970년 1분기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반면 국내총투자율은 25.3%에서 24.2%로 하락해 1975년 3분기(22.0%) 이후 51년 만에 가장 낮았다.
다만 국내총투자율 하락을 투자 자체가 급감한 결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소득이 투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전체 소득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업의 이익 증가가 국내 설비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는다면 반도체 호황이 끝난 뒤 성장률을 지탱할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는 남는다.
향후 경기 흐름을 놓고는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시각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은은 기업소득 증가가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화학·조선 등 다른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반기 법인세 중간예납과 기업 배당, 성과급 지급 등을 거치면서 기업의 이익 증가가 가계소득으로 이전되고 소비 회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반면 KDI는 수출과 기업 실적 개선이 아직 가계 전반의 소득 증가로 충분히 확산되지 않았다는 데 무게를 둔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과 설비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상반기 실질임금 상승률이 0.3%에 그치는 등 가계가 체감하는 소득 여건 개선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올해 성장률 전망에도 이 같은 시각 차이가 반영됐다. 한은은 기업소득 증가가 시차를 두고 소비로 이어지면서 내수 회복이 강화될 가능성을 반영해 올해 성장률을 3.3%로 전망했다. 반면 KDI는 기업 중심의 성장세가 가계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할 가능성을 감안해 3.2%를 제시했다.
결국 1인당 GNI 4만 달러 시대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소득을 얼마나 생산적인 투자와 가계소득 증가로 연결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저출산·고령화와 낮은 생산성 등 구조적인 저성장 요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수출가격과 환율에 힘입어 높아진 1인당 소득이 다시 정체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발 추가 세수가 벌어준 시간을 어떻게 잠재성장률 상승으로 연결시키느냐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