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인공지능(AI)과 현대미술·대중문화를 연결해 세계 문명에 기여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한류가 세계를 누비고 반도체 기술이 주목받는 지금, 한국이 인간과 예술에 대해 대체 불가능한 세계관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의 의제를 주도하는 ‘퍼스트 무버’로 도약할 시기를 맞은 것이다.
AI 시대의 성공은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질서에 맞는 질문과 기준을 찾아야 한다. 인간과 AI의 관계, 예술과 과학의 공진화는 이제 세계 주요 미술관의 핵심 의제가 됐다. 2022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미디어 아티스트 레피크 아나돌의 작품 ‘감독받지 않은(Unsupervised)’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200년이 넘는 MoMA 컬렉션의 공개 데이터에 대한 AI의 학습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했다. 이후 아나돌은 로스앤젤레스에 세계 최초로 AI 기반 예술을 전면에 내세운 미술관 ‘데이터랜드(Dataland)’를 열었다. AI가 미술관의 중심이 된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죄드폼미술관은 지난해 ‘ AI를 통해 본 세계(Le monde selon l’IA)’ 전시회를 개최했다. 분석형 AI와 생성형 AI를 구분하며 최근 10년의 AI 예술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명한 행사다. AI는 전시의 소재를 넘어 미술관의 연구·소장·아카이브 구조까지 바꿨다.
아시아는 AI 예술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앞서 2019년 중국국가박물관과 칭화대가 공동 기획한 ‘AS-Helix: AI 시대의 예술과 과학 융합’ 전시회는 세계 각국의 120여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AI 시대의 인간 인지, 예술 패러다임, 과학기술의 융합을 탐구했다.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이 지난해 개최한 ‘머신 러브(Machine Love)’는 AI와 게임, 가상세계, 감정과 정체성을 연결했다. ‘AI가 무엇을 만드는가’를 넘어 ‘인간과 기계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계에서 아시아는 더 이상 서구의 기술과 담론을 받아들이는 주변부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생산하는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설 것인가. 연구와 컬렉션에서 AI 시대 미술사의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AI가 무엇을 학습하느냐는 다음 세대가 접할 미술사의 지형을 좌우한다. 한국 미술의 작품과 문서, 작가의 디지털 기록을 정교하게 구조화해 AI가 읽을 수 있는 데이터로 구축한다면 한국 미술은 세계 미술사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세계의 AI 예술을 한눈에 경험할 수 있는 대규모 국제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려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작품과 질문을 한국에서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 AI가 무엇이든 학습하고 생성하는 시대일수록 사람이 한 공간에서 작품을 몸소 경험하고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전시는 더욱 대체 불가능해진다.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영감과 세계관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