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회생절차에서 조사위원의 기업가치 평가는 기업의 운명을 가르는 ‘첫 관문’으로 통한다. 제3자가 기업의 재무 상태와 생존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미래 업황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번의 가치평가가 회생 가능성을 지나치게 일찍 좁힐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왔다. 서울회생법원이 조사위원 평가보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협상을 앞세우는 방안을 검토하는 배경이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회생법원에서 조사위원이 선임된 법인회생 사건은 간이회생을 포함해 2024년 251건, 지난해 300건이었다. 올해도 이달 20일까지 174건에서 조사위원이 선임됐다. 절차를 간소화한 간이회생에서도 조사위원 선임이 일반적이다.
조사위원은 기업의 청산가치와 사업을 계속했을 때의 계속기업가치를 산정한다. 현행 채무자회생법상 채무자의 사업을 청산할 때의 가치가 사업을 계속할 때보다 큰 것이 명백하면 법원 회생계획 인가 전 회생절차를 폐지할 수 있다. 청산가치가 더 높으면 독자생존형 회생의 선택지가 줄고 신규 자금 유치나 인수합병(M&A) 등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계속기업가치가 기업의 향후 매출과 영업이익, 업황과 시장 상황 등을 토대로 산정되는 만큼 정확한 예측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도산 업계에서는 2017년 파산한 한진해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조사위원은 한진해운의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보다 높다고 판단했고 법원은 이를 토대로 회생절차를 폐지한 뒤 파산을 선고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물류 대란으로 해상운임이 급등하면서 해운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아 당시 가치평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최효종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한진해운이 3년만 버텼다면 전 세계적인 해운 호황의 수혜를 봤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며 “경제 트렌드는 계속 바뀌고 업황이나 시장 상황에 대한 전망에 따라 평가 결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기업가치 평가와 별개로 다른 회생 수단을 통해 살아난 사례도 있다. 쌍용자동차는 2021년 회생절차에서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보다 높게 평가됐지만 법원이 절차를 곧바로 폐지하지 않고 M&A를 추진했다. 이후 새로운 인수자를 찾아 회생절차를 졸업했다. 이는 특정 시점의 기업가치 평가만으로 회생 가능성을 단정하기 어려운 사례로 꼽힌다.
시간과 비용도 회생기업에는 부담이다. 조사위원은 가치평가 외에도 기업의 자산·부채와 부인권 대상 행위 등을 조사한다. 조사에 수개월이 걸릴 수 있고 조사위원 보수 등이 포함된 법원 예납금도 기업 규모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1억 원을 넘는다. 절차가 길어지는 동안 거래처가 이탈하거나 영업력이 떨어지면 기업가치가 더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회생 초기부터 채무자와 채권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회생 제도인 ‘Chapter 11’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진이 경영권을 유지한 채 기업을 운영하며 회생계획 수립을 주도하는 ‘점유채무자(DIP·Debtor in Possession)’ 방식을 취한다. 채권자위원회도 채무자의 사업과 재무 상태를 살피고 회생계획 협상에 적극 참여한다. 필요하면 법원이 독립적인 조사관(Examiner)을 선임할 수 있지만 제3자인 조사위원의 가치평가가 사실상 회생절차의 출발점이 되는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도 별도의 관리인을 선임하기보다 기존 경영자가 관리인 역할을 맡아 회생을 추진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지만 기업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는 조사위원 의존도가 높다. 법원이 기업의 생존 가능성을 먼저 가늠하기보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채무조정이나 신규 자금 투입 등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우선 협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조사위원 선임을 뒤로 미룬다고 곧바로 미국식 당사자 중심 회생이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 채권자들은 회생 초기 구조조정에 참여하기보다 조사 결과와 회생계획안이 나온 뒤 변제율을 따져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조사위원 없이 당사자 협상을 앞세울 경우 기업가치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어떻게 확보할지도 과제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회생회사는 이미 디폴트가 발생한 상태”라며 “회생절차 진입 이후 거래처 이탈 등으로 기업이 예상했던 매출과 실제 매출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변호사는 “기업의 회생은 결국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협상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며 “채무자와 채권자가 자율적으로 협상하고 법원은 뒤에서 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당사자의 자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