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취약차주에 대한 적극적인 부채 탕감에 나선 가운데 해외 주요국에선 정부가 별도 기금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개인 채무를 소각하는 사례는 드물다는 평가다. 정부가 연체 채권을 매입해 탕감하기보다는 금융회사가 부실채권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의 관점을 내재화할 수 있게 정책적 유인 구조를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평가다.
15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 당국은 장기 연체 채무자 재개 지원 방침에 따라 추가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에 대해서 가혹하리만큼 엄격하다”며 “5년, 10년 된 장기 연체 채무를 정리를 하는 것은 서구 사회에는 아주 기본적”이라고 말했다. 계좌·카드도 개설하지 못하는 장기 연체자들의 빚을 과감하게 정리해줘 다시 정상적인 납세자와 소비자로 복귀를 돕는 것이 사회 전체적인 효용도 더 크다는 판단이다. 정부가 새도약기금을 조성해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개인 채권을 사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부가 과감한 빚 탕감에 나서고 있지만 주요 선진국에서 국가가 재원을 조성해 빚을 정기적으로 탕감해주는 정책을 시행하는 건 드문 편이다. 금융위기 이후인 2010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모기지대출조정프로그램(HAMP)을 통해 위기 차주를 지원했으나 금융기관이 금리 인하나 만기 연장을 제공한 형태였다. 서민금융제도를 연구해온 한 연구원은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학자금 대출 탕감을 추진했지만 사회적 이슈가 워낙 컸던 배경이 있다”며 “새도약기금처럼 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를 해외에서 찾기는 힘들다”라고 말했다.
물론 한국과 해외와 동일선상에 두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 슬림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채권 추심 기능이 대부업권에 맡겨졌다. 이후 대부업권이 금융회사로부터 부실채권(NPL)을 대거 매입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내는 구조가 형성됐고, 이 과정에서 지금의 기계적인 소멸시효 연장과 장기 추심이란 특수한 관행이 고착화됐다는 설명이다. 한재준 인하대 교수는 “영국·미국과 같은 국가는 원 대출자가 끝까지 채권을 보유하며 추심하는 문화가 짙지만 한국은 IMF 이후 대부업자가 추심을 맡게 되면서 악성 취급자가 나타났다”며”며 “해외와는 환경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미 정부 주도의 채무 감면 프로그램이 세 차례 가동된 만큼 앞으로는 당국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금융회사가 자체 관리할 수 있게 유인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포용금융 관련 보고서를 통해 국민행복기금·새출발기금·새도약기금 등 반복되는 채권 소각 프로그램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 국회예정처는 “위기 때마다 반복되는 정부 주도의 채권 소각이나 대규모 기금 매입은 상환 의지를 약화할 수 있다”며 “일회성 채무 구제 방식보다 금융회사의 선제적 연체 채권 관리와 상시적 채무조정의 효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채무조정제도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서구에서도 민간 중심의 채무조정 문화가 활성화돼 있다. 미국·영국 등은 민간기관이나 비영리 단체가 취약 차주의 상환 능력을 평가해 채무조정 협상에 나서면 채권자의 수용력이 높다는 설명이다. 채무조정제도를 연구해 온 또 다른 금융권 인사는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은 소비자보호 의무를 통해 취약 채무자가 전 과정에 걸쳐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게 채권기관을 지침을 통해 규율하고 있다”며 “금융 감독 정책을 통해 금융회사가 소비자 관점을 내재화할 수 있게 정책적으로 유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부도 채무 탕감을 통한 경제적 편익을 주장하기에 앞서 소비·세수 증가분이 어느 정도인지 수치로 입증해 공론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