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공지능(AI) 모델 개발력은 세계 3위권까지 올라섰지만 정작 이를 실제 서비스와 산업에서 쓰고 키울 ‘실험장’은 부족하다. 국산 모델을 개발해도 이용자를 확보하고 다시 투자와 기술 개발로 연결하는 생태계가 약하다는 지적이다.
2025년 말 기준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AI 모델’은 미국이 59개로 가장 많았고 중국 35개, 한국 8개 순이었다. LG AI연구원과 네이버클라우드·SK텔레콤 등이 만든 모델이 글로벌 기준을 충족했다. 모델 개발력만 놓고 보면 한국도 미중을 뒤쫓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셈이다.
문제는 모델을 만든 뒤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발판으로 자국 AI 서비스를 빠르게 확산시키고 여기서 확보한 이용자와 데이터를 다시 기술 개발에 활용한다. 서비스가 성장하면 빅테크와 자본시장에서 추가 투자도 끌어온다. 기술 개발과 서비스 확장, 데이터 축적, 재투자가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다.
거대한 내수시장은 새 모델을 시험하고 고도화하는 실험장 역할도 한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상용화가 많이 되면 버그가 잘 잡히고 그만큼 개선하기가 쉬워진다”며 “문제들이 금방 노출되고 이것이 빅데이터가 돼 다시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AI 수요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하반기 한국의 AI 도입률은 30.7%로 조사 대상 147개국 가운데 18위를 기록했다. 상반기보다 4.8%포인트 뛰어 증가 속도는 조사 대상국 가운데 가장 빨랐다.
하지만 커진 수요가 국산 모델과 서비스의 성장으로 온전히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와이즈앱·리테일에 따르면 올 7월 국내 AI 챗봇 앱 월간 이용자는 챗GPT가 2367만 명으로 압도적인 1위였고 구글 제미나이가 947만 명으로 뒤를 이었다. 제타는 428만 명, 클로드는 344만 명이었다. 반면 토종 서비스인 에이닷은 115만 명, 뤼튼은 61만 명에 그쳤다.
이 같은 현상은 클라우드 등 기반 산업에서도 나타난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국내 기업들이 첨단 서비스 시장에서 글로벌 공급자로 성장하기보다 해외 기업의 ‘소비자’에 머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국내 민간 클라우드 시장에서도 아마존웹서비스(AWS) 이용 비중이 60.2%에 달하는 등 외산 업체의 영향력이 크다.
한국이 중국과 같은 방식으로 생태계를 구축하기에는 시장과 자본력에서 격차도 크다. 지난해 AI 민간투자는 미국이 2859억 달러, 중국이 124억 달러에 달했지만 한국은 약 18억 달러에 그쳤다. 중국과 비교해도 7분의 1 수준이다.
이에 모델부터 반도체·클라우드·서비스까지 모든 영역을 독자적으로 갖추려 하기보다 세계 AI 생태계에서 한국을 건너뛰기 어려운 분야를 선점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강 교수는 “AI 전 과정을 우리가 모두 가져가는 것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며 “메모리반도체처럼 AI 생태계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병목, 즉 ‘초크포인트’를 장악하는 전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