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력 제조업이 철수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가 빠져나갔던 전북 군산 구도심이 청년 창업 거점으로 바뀌고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일회성 사업비를 대는 기존 방식 대신 사업 경험과 유통망을 갖춘 대기업이 공간과 교육, 상품 개발, 판로 개척을 장기간 지원한 결과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이어가는 창업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096770) E&S(옛 SK E&S)가 2019년부터 ‘로컬라이즈 군산’ 프로젝트를 통해 육성한 군산 지역 창업팀 26곳 가운데 21곳이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중 10곳은 군산에 정착했다. 26곳의 누적 매출은 180억 원에 이른다.
SK이노베이션 E&S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군산 영화동 일대에서 이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제조업 쇠퇴로 고용·산업 위기를 겪던 군산에 청년 창업가를 유치하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농수산물을 활용한 사업을 만들도록 지원했다. 회사 측은 민간 대기업이 주도한 국내 첫 지역 도시재생 프로젝트라고 설명한다.
프로젝트를 이끈 최은정 SK이노베이션 E&S 지속가능경영3팀장은 “군산만의 자원과 역사·문화를 지역 전문가, 주민들과 함께 연구하고 이를 활용해 상징적인 로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며 “기존 상권과 중복되지 않는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지역에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E&S는 건물이나 도로 같은 물리적 인프라를 확충하기보다 창업가 커뮤니티와 지역 콘텐츠를 키우는 데 무게를 뒀다. 군산 영화동에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공간인 ‘로컬라이즈 타운’을 조성해 입주 기업에 사무실과 교육 공간, 커뮤니티 라운지, 외지 창업가를 위한 숙소를 제공했다. 창업 교육은 소셜벤처 육성 전문기업 ‘유디임팩트’와 함께 진행했다.
창업팀들은 지역 주민, 소상공인·농어민과 협업해 프로젝트 기간 매년 200개가 넘는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았다. 꿀스틱을 개발한 ‘리디브’는 단일 제품으로 1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협력 양봉 농가의 소득도 전년보다 25% 늘었다. 군산 캐릭터 ‘먹방이와 친구들’은 저작권을 지역 업체에 무상 개방해 30개 업체가 180개 제품을 출시했고 1억 2700만 원의 매출을 냈다.
그룹 자원도 동원됐다. 행복나래와 SK스토아 등이 참여해 상품기획과 전략 수립에 임직원들이 멘토로 나섰고 시식단·체험단을 운영해 상품성을 검증했다. 백화점과 홈쇼핑 등 외부 판로도 연결해 군산에서 개발한 제품이 전국 시장으로 나가도록 도왔다.
창업가의 성장 단계에 맞춰 장기간 동행하는 ‘페이서 모델’을 적용한 점도 눈에 띈다. 마라톤 페이스메이커처럼 창업팀 옆에서 함께 달리며 성장을 돕는 방식이다. 1차 연도에는 군산을 주제로 한 브랜드 개발, 2차 연도에는 지역 상인과의 협업, 3차 연도에는 다른 지역 창업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최 팀장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창업팀이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도록 프로젝트 기회와 교육·멘토링을 제공했다”며 “SK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제품의 시장성을 함께 확인하고 지역 안팎의 협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공식 육성사업이 끝난 뒤에도 지원은 이어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 E&S는 2019년부터 매년 ‘로컬라이즈 군산 페스티벌’을 열어 참여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고 지역 주민과 관광객, 전국의 로컬 창업가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지원이 끊기면 기업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거나 문을 닫는 기존 지역 창업 사업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조치다.
군산에서 시작한 모델은 부산과 해외로 확장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E&S는 2024년부터 부산시 등과 ‘아임인부산’을 운영하며 에너지·환경 분야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중소·벤처기업 35곳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현지 사회문제를 해결할 소셜벤처를 발굴·육성하고 있다.
최 팀장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청년들이 남아 사업을 키우려면 단기 성과보다 긴 호흡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성공뿐 아니라 실패 경험도 자산으로 축적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