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13년 만에 실물 금 매입을 재개한다. 국내 금 생산업체가 해외로 수출할 예정인 물량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한국거래소(KRX) 금시장과 한국예탁결제원의 거래·결제·보관 인프라를 활용한다. 올해 2분기 금 상장지수펀드(ETF) 투자에 나선 데 이어 국내 생산 금을 실제로 확보할 수 있는 경로까지 마련하면서 외화자산 다변화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한은은 3일 한국거래소·한국예탁결제원·국내 금 생산업체 LS MnM과 국내 생산 금 매입 협력체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0일 협력체계 구축 행사를 열고 구체적인 거래 방식도 마련했다. 금 생산업체가 수출 예정 물량과 희망 시기를 제시하면 한은이 금 운용계획과 국내외 금 가격, 시장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매입 여부를 결정한다. 거래는 KRX 금시장의 협의대량매매를 활용하고, 예탁결제원이 결제와 보관을 맡는다.
수출 예정 물량만 사들이는 것은 국내 금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다. 장내 일반매매가 아닌 협의대량매매를 활용해 장중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최소화한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실제 매입 시점은 예탁결제원의 인프라 구축과 생산업체의 수출 계획, 한은의 금 운용계획 등을 고려해 결정할 예정이다.
한은이 마지막으로 금을 사들인 것은 2013년이다. 2011년 40톤, 2012년 30톤, 2013년 20톤 등 모두 90톤을 매입했지만 이후 금값 하락으로 평가손실이 발생하면서 실물 금 매입을 중단했다. 이번 매입 재개로 13년 만에 국내 생산 금을 사들일 수 있는 공식 경로가 다시 열리게 됐다.
이번 조치는 금 보유 비중을 중장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6월 말 기준 한은의 외환보유액은 4273억 6000만 달러로, 이 가운데 금은 47억 9000만 달러로 1.1%에 그친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 다변화 차원에서 금을 꾸준히 사들이는 가운데 한은도 달러 중심의 외화자산 구성에 변화를 주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올해 2분기부터 시작한 금 ETF 투자와도 성격이 다르다. ETF는 외화 유가증권으로 분류돼 한은의 금 보유량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반면 이번 협력체계를 통해 국내 생산 금을 실제로 매입하면 실물 금 보유량을 늘릴 수 있다. 한은이 금에 투자할 수 있는 통로를 금융상품에서 실물까지 넓힌 셈이다.
다만 실물 금 매입의 규모 자체는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금 생산량은 연간 40~45톤 수준이지만 대부분 구리·아연 등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이 가운데 해외로 수출되는 물량은 연간 4~5톤 정도에 불과하다. 주요 생산업체는 LS MnM과 고려아연이다.
때문에 이번 조치가 외환보유액을 크게 늘리는 효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필리핀·에콰도르·콜롬비아 등 일부 국가가 자국에서 생산되는 금을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금광 생산 기반 자체가 약하기 때문이다. 해외 사례에서는 중앙은행의 금 매입이 금 보유 확대뿐 아니라 영세 광산의 제도권 편입과 금 거래 투명화 등 국내 금 산업 육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정부의 세제 지원은 향후 매입 기반을 뒷받침할 전망이다. 재정경제부가 이날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는 한은이 KRX 금 현물시장에서 매입한 금지금을 한국예탁결제원에서 인출할 때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2027년 1월 1일 이후 인출분부터 적용된다. 재경부는 개정 이유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확충 지원’을 제시했다.
금값이 최근 조정을 받은 시점에 매입을 재개하는 만큼 향후 금값 상승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에는 선을 그었다. 정희섭 한은 외자운용원장은 “특정 가격을 보고 매입 시점을 정한 것은 아니다”며 “업체가 매입을 요청하면 그때그때 국내외 금 가격과 시장 상황 등을 보고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국내 생산 금의 매입 규모가 크지 않아 외환보유액 확충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며 “다만 이번 조치로 향후 금 보유 비중을 확대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