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13년 만에 현물 금 매입에 나선다. 대상은 국내 업체가 생산한 수출 예정 물량이다. 올해 2분기 부터 금 상장지수펀드(ETF)를 사기 시작한 한은이 외환보유고 확충 차원에서 매입 채널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국내 금 생산 기반과 수출 물량이 워낙 적어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은은 3일 한국거래소, 한국예탁결제원, 국내 금 생산업체인 LS MnM과 국내 생산 금 매입 협력체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국내 생산업체가 해외 수출 예정 물량의 매입을 요청하면 한은이 국내외 금 가격과 시장 상황, 금 운용계획 등을 고려해 거래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거래는 한국거래소 금시장의 협의대량매매를 활용하고 한국예탁결제원이 결제와 보관을 맡는다.
이번 조치는 한은이 2013년 이후 중단한 현물 금 매입을 재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은은 2011년 40톤, 2012년 30톤, 2013년 20톤 등 총 90톤의 금을 매입했다. 하지만 이후 금값이 급락하면서 평가손실이 발생했고 당시 금을 고점에서 사들였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물 금 매입을 중단했다.
한은이 다시 금 매입을 결정한 것은 최근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 보유량을 늘리는 가운데 외환보유 구성 자산을 다변화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은의 금 보유량은 4월 기준 104.4톤으로 외환보유액의 3.5%다. 국제통화기금(IMF)를 제외한 국가·기관 기준으로는 세계 40위 수준으로 미국 8133.5톤, 독일 3349.5톤, 중국 2331.5톤 등 주요국과 격차가 크다. 또 달러화의 가치 하락 리스크에 대비해 금 보유량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정부의 세제 지원도 이번 결정을 뒷받침했다. 재정경제부가 이날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는 한은이 한국거래소 금 현물시장에서 매입한 금지금을 한국예탁결제원에서 인출할 때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개정안은 2027년 1월 1일 이후 인출분부터 적용된다. 재경부는 개정 이유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확충 지원’을 제시했다.
금값이 최근 조정받은 만큼 향후 상승을 염두에 둔 매입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한은은 선을 그었다. 정희섭 한은 외자운용원장은 “특정 가격을 보고 매입 시점을 정한 것은 아니다”며 “업체가 매입을 요청하면 그때그때 국내외 금 가격과 시장 상황 등을 보고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실제 매입 대상이 될 국내 금 수출 물량은 연간 4~5톤 수준이다. 국내 금 생산량은 연간 40~45톤이지만 대부분 구리·아연 등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산된다. 주요 생산업체로는 LS MnM과 고려아연이 있다. 한은은 국내 금시장에 추가 수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해외 수출 예정 물량만 매입하기로 했다.
한은은 올해 2분기부터 금 ETF를 매입해 금 투자를 본격적으로 준비해 왔다. ETF는 외화 유가증권으로 분류돼 금 보유량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앞으로 국내 생산 금을 실제로 매입하면 실물 금 보유량을 늘릴 수 있다.
다만 국내 생산 금 매입이 국내 업체 지원이나 외환보유액 확충 측면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금 생산량과 매입 대상 물량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한국은 금광 생산 기반도 약하기 때문이다. 해외 중앙은행의 자국 금 매입 사례와도 구조가 다르다. 필리핀·에콰도르·몽골·잠비아 등은 금광에서 생산되는 금을 중앙은행이 직접 사들이며 영세·소규모 광산의 제도권 편입이나 금 거래 투명화 등 국내 금 생산산업을 지원하는 목적도 갖고 있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외환보유액 확충 효과가 크지 않은 국내 생산 금까지 굳이 매입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자칫 시장에 한은이 금값 상승을 염두에 두고 금을 사들이는 것처럼 비칠 경우 불필요한 투기 심리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