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드래곤과 활시위를 당기는 요정 등 유럽식 중세 판타지에 익숙했던 게임업계가 ‘한국적인 서사’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갓을 쓴 도사부터 낙원상가를 헤매는 생존자까지,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은 ‘K-세계관’을 주무대로 삼은 신작들이 줄줄이 개발에 돌입했다. 높아진 K-콘텐츠의 위상과 참신한 소재를 원하는 글로벌 게이머들의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적 색채가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2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한국적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차기작들을 준비 중이다. 먼저 한국의 역사와 설화를 재해석한 시도들이 돋보인다. 과거에도 삼국시대나 임진왜란 등 국내 역사를 소재로 한 게임들이 일부 있었지만 대규모 전쟁에 초점을 맞춘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나 국내 소비자를 겨냥한 내수형 게임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세계 시장 공략을 위한 ‘트리플A급’ 게임에서도 전통적인 한국 소재를 적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단순한 전투에만 집중했던 과거작들과 달리 조선시대의 뒷골목을 정교하게 구현하거나 한국 전통 무예의 세밀한 동작을 담아내는 등 고증에 기반한 몰입감 있는 비주얼과 방대한 자유도를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넥슨게임즈(225570) 의 ‘우치 더 웨이페어러’는 한국 고전소설 ‘전우치전’을 기반으로 개발 중인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개발진은 작품 배경인 조선시대를 생동감 있게 담아내기 위해 한국관광공사와 협업하고 전국 각지 문화재를 답사했다. 스튜디오 이기몹의 콘솔 액션 기대작 ‘무사: 더티 페이트’도 정확한 복식과 검술을 구현하기 위해 학계와 전문가의 고증 과정을 거쳤다. 올해 10월 출시를 앞둔 카카오게임즈(293490) 의 ‘도깨비의세계’는 다채로운 한복을 입은 캐릭터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의 현대를 배경으로 삼는 시도도 이어진다. 넥슨의 ‘낙원: 라스트 파라다이스’는 좀비가 창궐한 서울을 배경으로 삼았다. 올해 3월 알파 테스트 참여자들로부터 여의도와 종로, 낙원상가 등 실제 도심을 고스란히 옮겨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마일게이트의 한국형 심리 공포 게임 ‘골목길: 귀흔’과 네오위즈(095660) 의 디스토피아 어드벤처 게임 ‘안녕 서울: 이태원편’도 낯익은 서울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펄어비스(263750) 가 개발 중인 ‘도깨비’는 현대화된 도시 속 한옥과 솟대가 등장하는 등 한국적 감성을 녹여낸 오픈월드 게임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올해 하반기 출시를 앞둔 엔씨소프트의 오픈월드 슈터 신작 ‘신더시티’는 한발 더 나아가 파괴된 미래 서울을 무대로 삼은 세계관을 구축했다.
해외 개발사들도 한국적인 서사를 전면에 도입하는 모습이다. 한국인 캐릭터 등 부분적 요소 차용에 그쳤던 과거와는 차별화된 흐름이다. 탄탄한 글로벌 팬덤을 구축한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신작 ‘모던 워페어 4’는 북한의 침공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설정으로, 한국군 박 이병을 조작한다. 최근 출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7’의 신규 DLC ‘붓과 검 컬렉션’은 임진왜란을 주축으로 다룬다.
국내외 게임사들이 이처럼 한국적 소재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K-콘텐츠 전반의 높아진 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퓨전 사극 ‘킹덤’ 등의 흥행으로 한국적 색채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양적인 소재도 글로벌 게임업계에 참신한 선택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게임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과 중국 게임인 ‘검은신화: 오공’의 흥행이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재홍 한국게임정책학회장은 “그동안 우리 게임업계는 주로 서구식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의존하며 차별화된 서사를 보여주지 못했다”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우리만의 문화적 요소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로 다듬어내는 ‘크로스컬처 스토리텔링’이 주목받으면서 게임업계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변화의 바람이 성장 정체에 빠진 국내 게임 산업의 반등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5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국내 게임산업은 2022년 22조2149억 원에서 2024년 23조8515억 원으로 매년 양적 성장을 이어가고 있지만, 같은 기간 수출액은 11조6039억 원에서 11조5985억 원으로 감소하며 과반 점유율이 깨지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업계에서 이번 ‘한국적 소재’ 붐을 국내 게임 수출 반등의 새로운 승부수로 보는 이유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과 교수는 “한국적인 소재의 게임들은 외국 이용자들에게 이색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며 “K-팝과 K-드라마 흥행의 온기가 K-게임에도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