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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천도부터 조선의 민란까지…역사를 움직인 ‘기후’

01.08.2026

427년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장수왕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한 줄의 기록만 남아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를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라고 배웠다. 역사학계에서는 국내성이 비좁은 데다 강대국 북위의 침공에 대비하고 국내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장수왕이 수도를 옮겼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리학자인 박정재 서울대 교수의 해석은 다르다. 박 교수는 신간 ‘기후로 보는 한국사’에서 장수왕이 수도를 옮긴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기후 변화를 꼽는다. 420~430년경 고구려에 수백 년 만의 춥고 건조한 기후가 찾아오면서 농사가 잘 되는 따뜻한 남쪽으로 나라의 중심을 옮겼다는 것이다.

책은 이처럼 기후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역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들여다본다. 앞서 ‘기후의 힘’과 ‘한국인의 기원’을 쓴 박 교수는 이번 신간에서 옛 문헌에 기록된 역사에 고기후학과 지구과학의 증거를 겹쳐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기후는 늘 배후에서 역사의 흐름을 조정해왔다. 간혹 이 잠재된 힘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면 인간 사회는 예외 없이 혼란에 휩싸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몽골의 고려 침공도 기후라는 틀에서 바라본다. 13세기 몽골 초원에는 지난 1000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려 군마들을 살찌우고 있었다. 반면 고려사에는 1230년 고려에서 “굶어 죽은 시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13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화산이 잇따라 터지고 바닷물의 온도가 뒤바뀌면서 한반도가 바짝 말라간 탓이다. 그리고 1231년 몽골의 침입이 시작됐다. 하늘은 칭기즈칸의 편이었던 셈이다.

조선의 민란도 기후와 관련이 깊다. 1670년과 1671년 경신대기근이 조선을 덮쳐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로부터 140년 뒤 홍경래의 난(1811년)이 평안도를 뒤흔들었다. 140년을 사이에 둔 이들 사건은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1년 내내 비를 뿌리는 거대한 비구름 띠인 ‘열대 수렴대’가 약 70년을 주기로 남쪽으로 밀려내려오는 현상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70년 주기로 열대 수렴대가 남하할 때마다 조선에 가뭄과 기근이 닥치고 이를 기폭제로 민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기후에 따라 조선 왕들의 ‘천운’도 엇갈렸다.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비가 풍족하게 내린 영조와 고종은 ‘하늘이 도운 왕’이었다. 반면 인조와 효종, 철종은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의 역풍’을 맞았다.

그렇다고 저자가 ‘기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조를 든다. 1783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이 폭발하며 발생한 화산 가스로 북반구 전체가 냉골이 되면서 세계는 대기근에 시달렸다. 기근으로 곡물값이 50%나 치솟은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이 발생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이 잘렸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가 갈수록 마르던 조선에서는 정조가 강력한 왕권으로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었다. 결국 ‘기후는 역사에 강하게 개입하지만, 기후가 곧 운명은 아니다’라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경남 지역의 낮 기온이 40도를 넘어서는 등 연일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 역시 역대급 폭염에 산불, 가뭄까지 겹쳐 신음하고 있다. 수천 년간 조상들을 위협했던 기후가 추위였다면 다가올 인류의 위협은 더위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책은 기후의 역사를 통해 다가올 기후위기 시대를 극복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기후사를 읽는 연구는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을 정성스레 닦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말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312쪽, 1만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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