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역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경쟁적으로 짓는 관행에 제동을 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앞다퉈 시설을 짓고 있지만 관람객은 줄어 재정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규 건립보다 기존 시설 활용을 우선 지원하고 국비 보조를 받은 거점시설도 5년간 운영 성과를 따져 재지정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26일 관가에 따르면 기획예산처는 2027년도 예산 편성부터 ‘거점 문화시설 확충 사업’을 별도 사업 유형으로 관리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역 대표성과 관심도, 주변 기반시설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5년 단위 중장기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에 포함된 박물관·미술관 등을 중심으로 국비 지원 대상을 정할 방침이다.
우선 박물관과 미술관은 신규 건립을 자제하고 기존 시설을 활용한 사업 위주로 지원을 검토한다. 공연장도 새로 짓기보다 국립청년예술단체가 상주할 기존 극장을 ‘지정형 국립극장’으로 지정해 지원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이 비슷한 문화시설에 중복 투자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거점 문화시설 지정 기간은 5년이다. 문체부는 기간이 끝나면 운영 실적과 성과를 평가해 재지정하거나 지정을 해지할 수 있다. 이미 국립문화시설 분관 등이 들어선 지역에는 추가 지원을 자제하고, 기획처가 전문기관을 통해 사업비의 적정성을 점검하는 장치도 마련했다.
기획처 관계자는 “일단 건물부터 세우고 이용객과 운영비 문제는 나중에 고민하는 관행을 줄이겠다는 취지”라며 “개관 이후 콘텐츠와 운영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까지 함께 따져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신축에 제동을 거는 배경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꾸준한 증가세가 있다. 문체부에 따르면 전국 박물관·미술관은 2020년 초 1164곳에서 2025년 초 1208곳으로 44곳 늘었다. 국립·공립뿐 아니라 사립과 대학 시설을 모두 합한 수치다.
특히 지역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전남은 박물관·미술관이 95곳에서 106곳으로 11곳 늘었고 충남은 66곳에서 75곳으로 9곳 증가했다. 전북은 59곳에서 66곳으로 7곳, 서울은 174곳에서 180곳으로 6곳, 경북은 81곳에서 86곳으로 5곳 각각 늘었다.
지자체 입장에서 보면 관광객 유치와 구도심 재생, 도시 브랜드 제고 효과를 한꺼번에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단체장의 성과로 홍보하기 쉽고, 국립시설로 추진하면 국가 재정 투입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시설은 늘었지만 관람객은 오히려 줄었다. 전국 박물관·미술관의 연간 관람객은 2019년 1억 1801만 명에서 2024년 9426만 명으로 2375만 명 감소했다. 시설 한 곳당 관람객도 10만 1385명에서 7만 8034명으로 23.0% 줄었다.
시설이 가장 많이 늘어난 전남의 관람객은 같은 기간 41.0% 감소했다. 전북은 34.1%, 경북은 13.2%, 서울은 11.0%, 충남은 5.9% 각각 줄었다. 코로나19 이후 관람 수요가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는데도 박물관·미술관은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관람객 감소에 따른 운영 부진은 공립시설을 중심으로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용객이 적더라도 시설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만큼 국비 및 지방재정 부담이 매년 누적될 수 있다.
실제로 연간 관람객이 5만 명에 못 미친 공립 박물관·미술관은 2020년 208곳에서 2025년 253곳으로 45곳 늘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6.8%에서 54.5%로 7.7%포인트 상승했다. 연간 관람객 1만 명 미만 시설은 37곳에서 60곳으로 증가한 반면 10만 명 이상이 찾은 시설은 150곳에서 127곳으로 23곳 줄었다.
전문가들은 거점 문화시설의 성패를 건물 수보다 주민이 계속 찾을 콘텐츠와 운영 역량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윤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거점 공간은 단순 물리적 공간의 확충이 아닌, 지역민의 문화 욕구를 고려한 프로그램과 공간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태로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정부가 5개년 계획을 통해 국비 지원 대상을 일괄적으로 선별하면 지역별 문화 수요와 특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보람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역의 문화진흥은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