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기후변화로 집중호우가 잦아지며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재난에 대한 재정적 대비 수준은 선진국보다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저밀도 지역은 재산보험 가입률 자체가 낮고 첨단산업은 시설 피해를 넘어 공장 가동 중단과 매출 감소로 번지는 손실까지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면서다.
17일 서울대학교 기후테크센터와 삼성화재가 2020~2024년 집중호우를 대상으로 보장격차(Protection Gap·PG)를 분석한 결과 평균 82%로 집계됐다. PG는 재난으로 발생한 경제적 손실 가운데 보험 등으로 보전되지 못한 손실의 비율을 의미한다.
피해보다 더 큰 ‘보장 공백’
최근 10년(2015~2024년) 국내 자연재해 피해를 보면 집중호우 피해는 연평균 2861억 원으로 전체 자연재해 피해의 61%를 차지했다. 태풍(23%), 대설(10%), 지진(2%)보다 피해 규모가 가장 컸다. 그럼에도 국내 집중호우 보장격차는 독일(약 72%) 등 주요 선진국보다 높아 기후재난에 대한 재정적 대비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분석됐다.
눈길을 끄는 점은 피해 규모가 클수록 보장격차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2년 수도권 집중호우는 경제적 손실이 8261억 원으로 가장 컸지만 보장격차는 60%였다. 반면 2021년 남해안 집중호우는 경제적 손실이 3295억 원으로 절반 이하였음에도 보장격차는 98%에 달했다. 피해 규모보다 재해 특성과 지역, 산업 구조에 따라 보험 보장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특히 강도가 낮은 호우일수록 오히려 보장 공백이 커지는 구조에 주목했다. 단시간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대형 재난은 피해 사실이 명확하고 보험금 청구도 활발하다. 반면 며칠간 비가 누적되며 비교적 작은 피해가 반복되는 경우에는 손실이 보험의 자기부담금과 비슷하거나 체감 보상액이 크지 않아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실제 2021년 남해안 집중호우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수일간 비가 누적된 저강도 호우였지만 보장격차는 98%에 달했다. 반면 서울 동작구에서 시간당 최대 141.5㎜의 기록적인 비가 내렸던 2022년 수도권 집중호우의 보장격차는 60%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소규모·반복형 재해가 개별 피해는 작더라도 보험으로 보전되지 않은 손실을 누적시켜 가계와 지역사회의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농촌은 가입률, 첨단산업은 운영중단이 문제
지역과 산업별로도 취약성이 다르게 나타났다. 농촌과 저밀도 지역은 재산보험 가입률 자체가 낮아 도시 서비스업 지역보다 보험 침투율이 약 70% 수준에 머물렀다. 농작물과 시설물 피해가 반복돼도 보험료 부담이나 낮은 위험 인식 등으로 충분한 보장을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반면 첨단산업과 중화학 산업은 다른 이유로 보험 사각지대가 발생했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공장처럼 고부가가치 산업은 건물 자체의 침수보다 생산라인이 멈추면서 발생하는 영업손실이 훨씬 크다. 하지만 이런 손실을 보장하는 ‘기업휴지(Business Interruption·BI) 담보’ 가입이 많지 않다. 삼성화재가 최근 5년간 기업종합보험 계약을 분석한 결과 BI 담보 가입 비율은 약 18%에 불과했다. 기업 10곳 중 8곳 이상이 건물·설비 피해 이후 발생하는 생산 중단과 매출 감소까지는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공장이 직접 침수되지 않더라도 전력 공급이 끊기거나 협력업체가 피해를 입어 생산이 멈추면 기업의 손실은 빠르게 불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재산보험만 가입한 경우에는 파손된 시설이나 설비의 복구 비용은 보장받더라도 영업 중단 기간 발생한 매출 손실과 고정비 부담까지 보상받기는 어렵다.
연구진은 이에 따라 PG를 단순히 보험 가입률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보험에 가입했는지보다 실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의 종류를 얼마나 폭넓게 보장하도록 설계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민지 삼성화재 기업안전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집중호우 피해는 시설 복구 비용을 넘어 생산 중단과 영업 차질, 공급망 교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재산 피해만 보장하는 보험으로는 실제 손실을 충분히 보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 심화…미보전 손실 2045년 2.6조 전망
향후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보장격차는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왔다. 현재와 같은 손해보험 침투율 증가 추세가 유지되면 재난 규모와 자산 증가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 2045년에는 보장 공백이 지금보다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20~2024년 연평균 4992억 원에서 2045년 2조5827억 원으로 5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연구진은 기업 BI 가입 확대와 함께 중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한 지수형 보험 활성화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수종 서울대학교 기후테크센터 교수는 “PG는 단순한 보험 통계가 아니라 국가의 기후 안전성과 금융 회복탄력성을 진단하는 핵심 지표”라며 “현재의 보험 보전 구조가 유지될 경우 기후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해 보장격차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