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 <편집자주>
오늘로부터 9년 전인 2017년 7월 3일. 15년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아산 갱티고개 살인사건’의 공범 2명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충남 아산경찰서는 이날 2002년 충남 아산에서 노래방 업주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강도살인 등)로 이모 씨(당시 50세)를 구속한 데 이어 공범인 중국 국적 최모 씨(당시 40세)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사건은 당시 확보된 혈흔·DNA·CC(폐쇄회로)TV 등 여러 단서가 있었음에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15년간 장기 미제로 남았다. 이후 DNA 분석 기술의 발전과 집요한 재수사가 맞물리면서 결국 범인들은 덜미를 잡혔다.
◇노래방 여주인 노린 계획범죄…현금 195만원까지 인출=2002년 4월 18일 충남 아산시 송악면 갱티고개에서 운동을 하던 주민이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상당히 부패한 상태의 시신은 아산 온천동에서 홀로 노래방을 운영하던 A씨(당시 46세)로 확인됐다. 부검 결과 목을 졸린 흔적과 목 부위 자상이 발견됐다.
수사 결과 이 씨와 최 씨는 같은 직장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직장을 그만둔 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범행을 계획했고, 평소 자주 드나들던 노래방의 여주인 A씨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범행 당일 이들은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A씨에게 “집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해 차량에 올라탔다. 약 20분간 이동하던 중 아산시 풍기동 인근에서 돌변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 씨는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차량을 몰았고, 최 씨는 흉기로 A씨를 위협하고 폭행해 금품과 현금카드를 빼앗았다. 이후 갱티고개 인근에서 A씨의 목을 조르고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했다. 당시 시각은 오전 2시 30분이었다.
범행 후 이들은 충북 청원과 대전, 전북 무주 등 5곳을 돌며 피해자의 카드로 8차례에 걸쳐 195만원을 인출했다.
◇CCTV도 DNA도 있었지만…15년간 미제로 남은 이유=사건 직후 경찰은 전담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나섰다. 피해자의 차량에서는 가해자로 추정되는 혈흔·담배꽁초·DNA가 발견됐고, 범인이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CCTV 영상도 확보됐다.
하지만 범인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전부 가린 데다 영상 화질도 좋지 않아 신원을 특정할 수 없었다. 확보한 DNA도 당시 데이터베이스만으로는 주인을 찾기 어려웠다.
전환점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DNA 분석 기술이 발전한 2012년 찾아왔다. 경찰은 갱티고개 사건의 증거물을 다시 감정했다. 현장에서 확보한 쪽지문을 피해자 노래방의 명함과 대조한 끝에 이 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하지만 이 씨의 DNA는 차량에서 발견된 담배꽁초, 혈흔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ATM CCTV에는 현금을 인출한 공범 최 씨만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씨는 다시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1만7000건 통화기록·명함 95장이 결정적 단서=재수사가 사건 해결의 열쇠였다. 경찰은 범행 현장 주변의 통화기록 1만7000여건과 피해자 노래방에서 확보한 명함 95장을 다시 분석했다.
그러자 명함 속 이름과 통화기록이 이 씨와 일치했다. 경찰은 2017년 6월 21일 이 씨를 검거했고,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중국 국적의 최 씨도 붙잡았다.
조사 결과 최 씨는 범행 후 4년간 국내에 머물다가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를 통해 중국으로 출국했다. 이후 자신은 수사망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는지 2014년 정식 비자를 발급받아 다시 한국에 입국했다.
범행을 계획한 사람은 이 씨였다. A씨를 살해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였다. 이 씨는 불법체류 신분이던 최 씨에게 “한탕하고 한국을 뜨자”, “너는 외국인이니 도망가면 그만이다”는 취지로 범행을 부추긴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게 범행 당일 두 사람은 정신을 잃은 A씨를 갱티고개까지 옮긴 뒤 흉기를 서로에게 떠넘기며 미뤘다. 결국 “못 하겠다”며 자리를 뜬 이 씨를 대신해 최 씨가 흉기를 휘둘러 A씨를 살해했다.
◇‘태완이법’으로 공소시효 넘겨 처벌…결국 무기징역 확정=이 사건은 자칫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다. 범행 당시 기준으로 강도살인 공소시효가 15년이어서 처벌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한 이른바 ‘태완이법’ 시행으로 법의 심판이 가능해졌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제1형사부는 2017년 11월 22일 이 씨와 최 씨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씨에게는 1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도 함께 명령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계획적으로 강도살인을 저지른 뒤 범행이 영구 미제로 묻힐 것을 기대해 태연히 아산으로 돌아와 생활해왔고, 범행을 숨긴 채 반성과 속죄 없이 살아왔다는 점 등에서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계획한 강도살인은 아니었다”며 즉각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와 친분이 있던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살려둘 경우 곧바로 자신들의 신원이 드러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헛기침을 범행 신호로 미리 짜둔 점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고 판단했다. 또 서로 범행을 제지하지 않은 채 함께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계획범죄가 맞다고 봤다.
이들은 대법원에도 상고했지만 별다른 변론 없이 상고가 기각됐고, 같은 해 무기징역이 최종 확정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