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공지능(AI) 데이터 기업 팰런티어를 키워낸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벤처투자 모델이 한국에 도입된다. 정부가 AI·드론·우주항공 등 신안보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고 성공하면 성과를 공유하는 ‘한국형 인큐텔(IQT)’ 설립에 나서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통해 AI, 드론, 우주항공, 사이버 보안 등 첨단 안보 분야 스타트업을 길러내 2030년까지 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신안보 기업 5곳과 매출 1000억 원 이상 기업 50곳을 키운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미래 신안보 혁신기업 육성 전략회의’에서 “현대의 안보 환경은 기술이 승패를 가르는 기술 안보 시대로 바뀌었다”며 “전장은 지상·해상·공중을 넘어 우주와 사이버·AI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고 첨단 반도체와 드론·로봇·인공위성·네트워크 등 민간의 첨단 혁신기술이 국가 안보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열쇠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통적인 방위산업 강국을 넘어 글로벌 신안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혁신기업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핵심이 한국형 인큐텔이다. 정부는 CIA가 1999년 설립한 비영리 벤처캐피털 인큐텔을 모델로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방식이며 한국벤처투자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기로 했다. 한국벤처투자를 비롯해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등이 공동 출자해 총 500억 원 규모의 재원을 조성하고 이후 4년간 추가 재원을 확보할 계획이다. 조성된 자금은 신안보 분야 초기 스타트업 지원에 집중 투입된다. 미국 인큐텔 역시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또 모태펀드 출자 펀드와 방산 정책펀드 등을 활용해 1조 원 이상 규모의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신안보 기술 특화 자산운용사인 ‘한국 전략기술 파트너스(가칭)’를 설립해 향후 5년간 연구개발(R&D)과 사업화 등에 투입될 최대 10조 원 규모의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지만 이러한 위기를 새로운 산업 성장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며 “기존 대기업 중심의 하드웨어 무기 체계에서 혁신 기술과 첨단 무기 체계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원 대상 기업을 3단계로 발굴·육성할 계획이다. 전략 분야 기술과 경험을 보유한 기업은 ‘우수 기업 풀(Pool)’에 등록하고, 기업가치 300억 원 이상이면서 필요한 기술 역량을 갖춘 기업은 ‘후보 기업’, 기업가치 1000억 원 이상이면서 민군 겸용 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혁신기업’으로 지정한다.
또 신안보 기술이 적용된 무기 체계의 조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신속 조달 체계를 구축한다. 국방 분야에는 첨단 무기 체계의 최초 배치 기간을 1년 이내로 단축하는 ‘첨단기술형 획득 제도’를 신설하고 우주항공 등 비국방 분야에는 혁신기업의 기술과 제품을 신속히 계약·구매할 수 있는 혁신촉진형 계약 제도를 도입한다.
신안보 전용 ‘OTA형 R&D’ 제도도 마련한다. 기업당 최대 5년간 100억 원 규모를 지원할 예정이다. OTA는 미국 연방 기관이 혁신 기술과 제품을 신속하게 계약·실증·구매할 수 있도록 한 특례 계약 제도다.
회의에서는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개발 문화의 필요성 또한 제기됐다. 유콘시스템의 한은수 대표는 “스피드도 중요하지만 개발과 운용, 현장 피드백을 반영한 개발이 중요하다”며 “실패의 원인을 감사 대상이 아니라 기술 축적의 과정으로 봐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필요한 기술이라면 정부가 펀드나 연구 기금으로 투자하고 실패하면 감수하되 성공하면 지분이나 성과를 공유하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지원하거나 빌려주는 데 그치지 말고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투자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주항공청은 우주를 ‘신안보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위성 데이터 처리·저장 시장 선점에 나서는 한편 AI 무인기와 전기·하이브리드 추진 수직이착륙 항공기의 자체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혁신 기술 개발 과정에서 보안 강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보안 기업 시옷의 박현주 대표는 “사이버 보안이 담보되지 않으면 AI는 국가 경쟁력이 아니라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며 “공공 보안 예산을 국가전략산업 수준으로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이 같은 업계 의견을 반영하는 한편 지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범정부추진단을 구성하고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혁신기업 중심의 새로운 국방 조달 생태계를 구축할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