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으로 시장에 풀릴 유동성이 50조 원대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한국은행이 이례적으로 정보기술(IT) 업종 성과급을 물가 상방 위험으로 공식 지목했다. 중동발 사태가 일단락되면 유가는 하방 가능성이 있는 만큼 임금과 기대인플레이션의 확산을 더 경계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이남강 한국투자금융지주 이코노미스트는 “한은이 유가 하락 자체보다 임금 상승 압력을 더 경계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며 “물가 상방 위험을 강조하면서 긴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이처럼 경계감을 높인 데는 이유가 있다. 상반기 물가설명회에서 별도 분석 대상으로 삼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IT 업종 특별급여는 올해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60.6% 급증했다. 같은 기간 IT 외 나머지 임금 상승률은 2.1%에 그쳤다. IT 업종 종사자 비중은 크지 않지만 전체 임금 상승률(3.4%)에 대한 기여도는 1.3%포인트에 달했다.
한은은 특히 고액 성과급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한은이 최근 공개한 ‘2026년 상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성과급 규모가 극단적으로 클 경우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타 산업 임금 반응의 이례적 효과는 통상적인 경우 대비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기업의 초대형 성과급이 다른 업종의 임금인상 요구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IT 제조업 노동집약도(37.92)의 네 배에 달하는 서비스업(140.86)에서 임금이 오르면 음식값·숙박료·학원비 인상으로 곧바로 전가될 우려도 있다.
서비스업으로 파급되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반도체 종사자의 소득이 늘면서 인근 식당·숙박·학원 등 서비스업 소비가 확대되고 이에 따라 서비스업 구인 수요가 늘면서 임금이 올라가는 수요 경로가 있다. 동시에 ‘우리도 성과급을 올려달라’는 타 업종 근로자의 요구가 확산되는 준거임금 경로도 작동할 수 있다. 송병호 한은 팀장은 “서비스업으로 파급되는 경로가 중첩돼 나타날 수 있다”며 “중간 경로를 정확히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서비스업에서 임금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지호 한은 조사·통계담당 부총재보도 “IT 전문인력들의 휴먼무브가 있을 것이고 인근 외식물가 상승, 백화점 매출 증가 등의 영향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했다.
중앙은행이 임금 충격을 유독 경계하는 것은 임금의 속성 때문이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유가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내려올 수 있지만 임금과 기대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면 물가 압력이 훨씬 길게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가는 올랐다 내려가면 영향도 함께 빠지지만 임금이 오르면 기업과 가계의 기대인플레이션까지 자극해 임금과 물가가 서로를 밀어올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호황이 성과급 확대와 자사주 평가이익 증가, 사내대출 확대 등으로 이어지며 상당한 규모의 유동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성과급 및 사내대출 규모가 내년까지 최대 53조 6000억 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삼성전자의 경우 내년 현금화 가능한 특별성과급만 약 7조 6000억 원으로 추산되고 저금리 사내 주택자금 대출까지 포함하면 잠재 대출 규모는 최대 29조 원에 달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도 성과급 실수령액이 15조 원 이상으로 예상되며 사내 주택구입 대출도 1조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수도권 남부를 중심으로 반도체 기업 셔틀버스 통근권을 뜻하는 ‘셔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반도체 성과급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될 경우 집값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가 발생하고 전월세 임대료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주거비 인플레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내대출은 일반 금융권 대출과 달리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시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한은이 물가설명회에서 성과급과 관련 우려를 직접 연결해 언급한 것은 아니다. 다만 파급 경로와 규모를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통화당국이 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다는 것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은은 통상 인과관계가 명확한 경로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리스크를 먼저 꺼내 들었다. 한은 조사국은 이번 물가설명회에서 “이번처럼 이례적인 상황에서는 파급 규모가 과거 추정치보다 클 수 있다”고 인정했다. 불확실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제 경고를 택한 셈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한은의 우려가 다소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다. 손범기 바클레이즈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반도체 성과급으로 내년 전체 성과급 지급액이 늘더라도 경제 전반의 임금 상승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며 “임금과 물가의 순환구조가 형성되기까지는 한은 분석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