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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을 사라…워싱턴에 돈 쏟아붓는 기업들

19.06.2026 1분 읽기

지난 1월 미국 의회에서 일부 하원의원은 “미국 기업 쿠팡이 한국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3000만 명이 넘는 고객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쿠팡이 한국 국회에서 강한 질타를 받자 이를 ‘정치적 마녀사냥’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에서 벌어진 소비자 피해 사건이 미국 정치권으로 넘어가 미국 기업 차별과 통상 갈등 이슈로 돌변한 것이다.

LG글로벌전략개발원에서 미주 지역 대외협력 및 정책 대응 업무를 맡고 있는 저자는 쿠팡의 사례에서 오늘날 로비의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로비의 핵심은 기업에 불리한 사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해석하는 틀을 바꾸는 데 있다.

로비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정책이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관계자를 접촉하고 설득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로비는 부정한 청탁, 뇌물, 특혜 등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로비가 단순한 뒷거래가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은 자국은 물론 해외 정부와 의회, 규제기관이 만드는 규칙 위에서 경쟁해야 한다. 관세와 반도체 보조금, 전기차 세액공제, 플랫폼 규제 등 정책 결정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까닭이다.

저자는 로비를 미화하거나 악마화하지 않는다. 대신 쿠팡·엔비디아·구글·애플·보잉·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로비가 어떻게 작동하고 기업과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단적으로 지난해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14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자 중국 생산 의존도가 높은 기술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언론에 나와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비판했다. 하지만 팀 쿡 애플 CEO의 대응은 달랐다. 그는 공개 비판 대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관세가 아이폰 가격에 미칠 영향을 상세히 설명했다. 일주일 후 트럼프 행정부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전자제품을 관세 대상에서 제외했다. 저자는 “로비는 기업이 제도 변화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으려는 지대추구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 결정자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기업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정보 교환의 성격도 함께 갖는다”고 설명한다.

규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규제의 틀을 설계하는 로비의 대표적 사례로는 구글을 꼽았다. 구글은 유럽연합(EU)이 디지털시장법(DMA)을 설계하는 초기 단계부터 의원들에게 기술 브리핑과 경제 분석 보고서를 제공하고 전문가 증인을 지원했다. 저자는 이를 기업이 규제를 무조건 배격하기보다 유리한 규제를 만들도록 이끈다는 ‘규제포획이론’으로 설명한다.

책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로비를 관리하는 제도도 상세히 다룬다. 미국은 로비공개법(LDA)을 통해 기업과 로비 회사가 분기마다 로비 비용과 로비 이슈 및 대상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로비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로비가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공개와 보고 의무를 둬 감시가 가능한 제도권 안으로 편입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쿠팡이 지난해 4분기에 제출한 로비공개법 보고서를 보면 로비 지출로 58만 달러를 신고했고 구체적 의제로 미국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 한국·일본·EU 등 동맹국과의 경제·상업적 유대 강화를 적었다. 접촉 대상도 상·하원에 그치지 않고 상무부·국무부·재무부·국가안보회의·무역대표부까지 광범위했다. 유럽 역시 로비 활동을 공개하는 투명성 등록부 제도를 두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도 로비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투명하게 관리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공직자윤리법과 부정청탁금지법이 유사한 기능을 일부 담당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로비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도 공식적인 로비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로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남아 있다. 보이지 않게 둘 것인가? 아니면 보이게 만들 것인가?”

224쪽, 1만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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