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필수의약품의 공급이 최근 5년간 300번 넘게 끊긴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서울경제신문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실을 통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6년 2월까지 공급중단 또는 부족으로 보고된 국가필수의약품은 307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기간 공급중단 또는 부족으로 제약사가 보고한 전체 의약품 1424건의 약 21.6% 수준이다.
국가필수의약품은 질병 관리, 방사능 방재 등 보건의료상 필수적이지만 시장 기능만으로는 안정적 공급이 어려운 의약품을 관리하기 위해 2016년 마련된 제도다. 약사법에 따라 관계 중앙행정기관 간 협의를 거쳐 지정·관리한다.
그러나 제도 시행 10년가까이 되도록 국가필수의약품의 공급 차질 사례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25년 보고건수는 공급부족 31건, 공급중단 50건을 합쳐 81건으로, 2021년(29건)보다 2배 이상 증가하면서 5년 새 최고치를 나타냈다. 항생제나 진통제 같은 일상적 의약품부터 파킨슨증, 부정맥, 급성 천식 등 만성질환 치료제,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까지 공급 차질이 빚어진 의약품의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대체의약품이 없거나 대체의약품 유무가 파악되지 않은 경우도 52건이나 됐다.
의약품이 공급 차질을 빚는 데는 미국·이란 전쟁과 같은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원료의약품의 높은 해외 의존도, 일시적인 수요 증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실제 식약처가 분류한 국가필수의약품의 공급 부족·중단 원인은 제조원 문제(67건)·원료 수급 문제(36건)·채산성 문제(31건)·행정 절차상의 문제(28건) 등으로 다양했다. 원인을 명확히 특정하지 못해 기타로 분류한 사례도 57건이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돈이 안 돼서’ 생산 동력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됐다.
더욱 큰 문제는 의약품 공급을 추적·관리하는 식약처의 보고·분류 시스템이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급성 불안장애와 경련 등의 상황에서 쓰이는 필수 약물인 ‘아티반(성분명 로라제팜)’ 주사제의 경우 2022년 7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2년 6개월간 15차례나 공급부족·중단이 보고됐다. 아티반은 제약사가 채산성 문제로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음달부터 공급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가 대체 생산처를 구하면서 가까스로 넘겼다. 수년간 경고음이 울렸음에도 필수약의 공급 문제를 기업 자체에 맡긴 채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심지어 대체의약품 유무도 ‘있음’(10건)과 ‘없음’(5건)을 오갔다. 같은 약을 15번이나 들여다보면서도 대체 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다는 점에서, 식약처 분류 체계의 신뢰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이종혁 중앙대 약대 교수는 “국가가 필수라고 지정해놓은 약의 공급 위기를 10여 차례 보고받으면서도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대체 가능성을 달리 판단했다는 건 시스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제약사의 보고에만 의존하는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유사한 사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환자실 필수약 ‘아티반 주사’ 15번 경고음…재고 동나기 직전에 가까스로 위기 면해
필수의약품의 공급부족과 생산 중단 보고가 매년 증가하는 것은 개별 제약사의 문제라기 보단 정부의 관리 감독 체계의 허점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약사의 사후 보고를 받아 분류하는 수준의 정부의 소극적 대응이 보건 안보와 직결되는 필수의약품의 수급불안을 키웠다는 것이다.
식약처가 필수의약품 공급 부족과 중단 보고를 받은 뒤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공급부족 또는 중단으로 보고된 국가필수의약품 307건 중 식약처가 직접 생산이나 수입을 독려하거나 주문생산을 유도한 경우는 8건(2.6%)에 불과했다. 해외 긴급도입 사례를 포함해도 31건(10.1%)에 그쳤다. 수요 급증이나 생산, 수입 일정 등 일시적 문제로 공급이 중단됐다가 재개된 경우(108건·35.2%)를 제외하면 ‘대체약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 없이 종결된 사례(101건·32.9%)가 가장 많았다.
대체의약품이 있다며 식약처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국가필수의약품에 대해서도 의료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동일한 효능으로 허가받은 의약품이 있어도 성분이 달라 약효의 기준이 되는 약동학적 특성(PK)이 차이를 보이는 만큼 대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몸무게가 정상 신생아의 10분의 1 남짓인 초미숙아에겐 더욱 위협적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중증 신생아 환자를 돌보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 사이에선 7월부터 ‘코티소루주(히드로코르티손 주사제)’의 공급이 중단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코티소루는 내분비 장애, 류마티스 질환, 중증의 쇼크, 급성 알레르기 반응 등에 다빈도로 처방되는 의약품이다. 의료진들은 성인이 아닌 신생아나 소아 중환자가 쇼크 상태에 빠져 혈압이 잘 유지되지 않을 땐 이를 대체할 약이 없다고 지적한다.
한올바이오파마가 지난해 11월 이 약에 대해 공급중단을 보고한 것은 채산성 문제 때문이다. 코티소루는 2022년 건강보험 급여 대상에서 제외된 이후 약값이 앰플당 2000~5000원대로 형성돼 있는데, 절대적인 수요가 높지 않은 데다 제조 원가가 높다. 제약사 입장에선 공급을 지속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다. 현장 의료진들의 원성이 커지자 식약처는 오는 11월 중반께 생산 및 공급이 재개되며, 기존 보유 재고로 공급 유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중소병원들 중 상당수는 벌써 재고가 바닥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필수의약품의 가격이 ‘너무 싸서’ 사라지는 기형적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진제약이 생산을 맡기로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공급 중단 위기를 넘긴 아티반 주사제의 경우 앰플당 가격이 782원에 불과하다. 갈수록 강화되는 무균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에 대응하려면 비용 투자가 필요한데, 향정신성의약품의 특성상 관리 비용이 더 드니 기업들이 생산을 꺼릴 수밖에 없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정부는 2020년 의료 현장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700여 개 성분을 ‘안정확보 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중요도에 따라 카테고리 A·B·C 등으로 세분화해 상시 모니터링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또 팬데믹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특정 약물이 부족해질 경우에 대비해 제약사에 최소 2~6개월 분량의 원료 및 완제품 비축을 권고 및 지원하고 있다. 2024년에는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약세 등을 반영해 수술용 항생제와 같이 원가를 유지하기 어려운 필수의약품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상한 바 있다.
정부가 뒤늦게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지난해 국내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의약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생산 시설과 장비 구축비를 보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부턴 지난해(9억 원)보다 예산 규모를 4배로 확대했다. 다만 지원 규모가 미미한 데다 그마저도 사후약방문식 대책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제약업계에선 약가를 일부 보전해주는 방식으론 기업들의 지속적인 생산을 유도하기 어렵다며 공급 안정성을 고려한 약가 정책이 필요하다고 토로한다. 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국가 차원의 필수의약품 관리체계를 재정비하고 생산기업 수와 공급 위험도를 상시 점검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생산 기업이 줄어드는 품목에 대해서는 공동생산 플랫폼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