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난양공대(NTU)에서는 대학과 기업의 경계를 찾기 어려웠다. 캠퍼스 곳곳에 글로벌 기업 연구소가 들어서 있었고 학생들은 강의실보다 연구 현장에서 더 바쁘게 움직였다. 독일 자동차 기업 아우모비오의 공동 연구소에서는 대학 연구원과 기업 엔지니어가 한 공간에서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곧바로 상용화 가능성을 검토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산학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곳에서 연구와 사업화는 동시에 진행됐다.
이 같은 산학 협력은 산업 경쟁력 강화는 물론 우수 인재를 끌어들이는 난양공대의 핵심 전략이다. 연구가 실제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 환경은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 결과 지난해 영국 데이터 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 명단에 난양공대 소속 33명이 이름을 올렸다. 문승기 난양공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한국에서는 산학 협력이 기업의 문제를 외주 형태로 해결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이곳에서는 로봇 기술이 실제 완성차 검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을 볼 수 있어 연구자로서 효능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 중심에는 알리바바·롤스로이스·델타 등 글로벌 기업 25곳과 함께 세운 공동연구소(Corporate lab)가 있다. 연구자들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혀 기업과 대학이 상시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대학은 연구를 곧바로 산업 현장에 적용하고 기업은 대학의 연구 역량을 활용하는 ‘윈윈’ 구조다. 실제 캠퍼스 곳곳에서는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전기차가 시험 주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학 전체가 혁신 기술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끈끈한 산학연 협력이 가능한 이유는 싱가포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600만 명의 작은 내수 시장과 물·식재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특성상 정부와 기업·대학이 따로 움직여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공동연구소 설립은 싱가포르 국가연구재단(NRF)과 과학기술연구청(A*STAR)의 중개와 투자하에 전략적으로 진행된다. 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연구 계획을 제안하면 정부가 심사를 거쳐 펀딩하는 IAF-ICP 프로그램도 대표적인 사례다.
싱가포르가 5년마다 발표하는 국가 연구개발(R&D) 로드맵 ‘RIE(Research, Innovation and Enterprise)’는 단순 연구비 투자 계획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RIE2030에는 향후 5년간의 공공·민간 공동 연구 계획, 규제 샌드박스,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 등이 담겼다. 송주하 난양공대 화학생명공학부 교수는 “싱가포르는 기술이 빠르게 상용화될 수 있도록 규제 정비에 힘쓴다”며 “예컨대 3D 프린팅 기술의 안전성 평가 기준을 신속하게 마련해 한국보다 먼저 3D 프린팅 건축물을 구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과는 실제 사업화로 이어지고 있다. 난양공대 3D 프린팅센터는 전 세계 400개 기업과 협력하며 한 달에 약 16억 원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정부 지원금을 일절 받지 않고 계약 수익만으로 운영될 정도다. 난양공대는 산학 협력과 기술사업화, 창업을 전담하는 조직인 ‘NTUitive’도 별도로 두고 있다. NTUitive가 육성한 스핀오프와 스타트업의 누적 기업가치는 약 16억 싱가포르달러(약 1조 7000억 원)에 이른다.
산학 협력은 석박사 등 세계 각국의 인재들이 난양공대를 찾는 유인으로도 작용한다. 난양공대와 모션 테크놀로지 기업 셰플러 공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데이비드 라이 씨 역시 난양공대 기계항공공학부 재학 시절 인턴십을 거쳐 정규 엔지니어로 채용됐다. 그는 “연구소에서는 인턴들도 실제 기업에서 활용되는 로봇을 개발하고 테스트할 기회를 얻는다”며 “이론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전했다.
자연스레 교육 과정은 ‘산업형 인재’를 길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 싱가포르는 학부 학점에 따라 연봉이 달라진다. 그만큼 전공 교육이 산업과 직무에 대한 이해로 직결된다는 인식이 강하다. 교수들은 기업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커리큘럼을 수시로 조정해야 한다.
교수 평가와 테뉴어 심사 역시 단순 논문 중심이 아니다. 특허와 지식재산권(IP), 창업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최근 난양공대는 ‘연구가 해당 분야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살피는 사회적 영향력 지표도 도입했다. 정성적인 평가를 위해 동료 교수 평가와 해외 전문가 심사까지 동원한다. 엄격한 심사 탓에 테뉴어를 인정받는 비율은 60~70%에 그친다.
조남준 난양공대 석좌교수는 “아무리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인재는 모이지 않는다”며 “연구를 실제 산업과 연결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산학 협력은 인재와 국가를 잇는 핵심 고리”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