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찾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는 거대한 배관과 저장탱크, 굴뚝이 늘어선 전형적인 중화학 공업단지의 모습이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설비와 원유를 실은 탱크로리, 분주히 움직이는 근로자들의 모습은 수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60년 넘게 한국 산업화를 이끌어온 익숙한 노후 산단이지만, 제조 현장의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학습시켜 생산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국내 최대 석유화학 집적지인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가 ‘제조 AI 전환(M.AX)’의 실험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AI가 제조 데이터를 학습해 공정 최적화와 설비 예지보전, 안전관리까지 지원하는 ‘제조 AX’ 생태계 구축이 추진되고 있다. 울산·미포산단은 선도기업이 축적한 제조 데이터를 기반으로 석유화학 공정에 특화된 AI 모델을 개발·고도화하는 ‘제조 AX 인큐베이터’ 역할을 맡았다. 이번 사업을 주도하는 산업통상부와 한국산업단지공단은 이 같은 성과를 중견·중소기업까지 확산시켜 산업 전반의 AI 전환을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1962년 1월 지정된 울산·미포 산단은 국내 최초의 국가산단이다. 전체 면적은 4만 8468제곱미터(㎡)로 국가산업단지 중 가장 큰 규모다. 석유화학을 시작으로 자동차, 조선 등 약 1100개사 이상이 입주해 있으며, 해당 기업들의 생산액 총합은 2025년 기준 177조 원에 달한다. 한국 산업화를 상징해온 이 산단은 지난해 9월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 60년 넘게 축적된 제조 현장에 AI를 입히는 ‘울산 석유·화학 AX 실증산단 구축사업’이 본격화되면서다.
이 사업은 2028년 말까지 약 290억 원을 투입해 울산·미포 국가산단을 중심으로 석유화학 업종에 특화된 ‘버티컬 AI’ 모델과 실증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주관기관은 울산정보산업진흥원이며 SK에너지,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울산대, 산단공 울산지역본부, AI 공급기업 등이 참여한다. 현장의 온도·압력·유량·설비 상태 등 수많은 제조 데이터를 모아 AI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고, 이를 실제 공정에 적용해 효과를 검증하는 방식이다.
울산이 석유화학 AX 실증지로 주목받는 이유는 산업적 상징성 때문이다. 울산·미포 국가산단은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등 굵직한 산업들이 밀집한 국내 대표 산단이다. 특히 석유화학 분야는 정유, 석유화학, 정밀화학, 플라스틱, 고무, 바이오화학 등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가 크다. 울산의 실증 모델이 성공하면 여수, 대산 등 다른 석유화학단지뿐 아니라 조선·자동차 등 다른 주력 제조업으로도 확산될 수 있다.
기존 스마트그린산단 사업이 공정 자동화와 데이터 수집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사업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제조 현장에 AI 모델을 적용하고 효과를 검증하는 ‘AI 전환’이 목표다. 윤기수 산단공 울산지역본부장은 “기존 디지털 전환(DX) 사업이 데이터화 자체에 무게를 뒀다면 울산 AX 실증산단은 실제 제조 현장에 AI 모델을 적용·검증하는 상위 단계를 지향한다”며 “선도기업이 축적한 압도적 석유화학 데이터를 토대로 석유화학 특화 AI 모델을 개발·검증한 뒤 중견·중소기업에 확산하는 상생형 체계를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사업을 개시한 이후 지난 10개월 동안은 거버넌스 구축과 중장기 AX 계획 수립, 기반 인프라 조성이 중점적으로 추진됐다. 먼저 산업계·학계·전문가·유관기관이 참여하는 ‘울산 미니(MINI) 얼라이언스’를 구성해 제조 현장 중심의 AX 수요 발굴, 수요·공급기업 간 매칭, 기술 교류 등을 진행했다. 또 선도공장 역할을 맡은 SK에너지로부터 현장 데이터를 제공받아 버티컬 AI 구축을 위한 사전 가공 작업도 진행 중이다. 현재 울산정보산업진흥원 내에 AI 수요-공급 기업 매칭, 기업 AX 컨설팅, 제조 데이터 처리·저장 등을 할 수 있는 AX 종합지원센터도 구축하고 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울산·미포 산단은 단순한 생산기지를 넘어 제조 AI 모델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실증 무대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산단공과 울산정보산업진흥원, 울산 MINI 얼라이언스는 울산·미포 산단을 넘어 전국 산단으로 M.AX 성과를 확산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동구 울산 MINI 얼라이언스 위원장은 “울산·미포 산단의 AX 실증산단 구축사업은 전국 석유화학단지는 물론 다른 산단에도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