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은 중동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낸 계기가 됐다. 중동 중심의 화석연료 공급망은 다변화하고 새로운 안보자산으로 떠오른 핵심광물에 대한 공급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전쟁 기간 중동의 빈자리를 빠르게 대체한 곳은 미국이었다. 올 1~4월 미국이 한국에 수출한 원유는 62억 66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3.1% 늘었다. 특히 호르무즈해협이 막힌 3월과 4월 미국의 대한국 원유 수출액은 전년 대비 각각 54.3%, 113.6% 증가했다.
미국산 원유 수입 경쟁에 나선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이 기간 일본(299.5%), 유럽연합(EU·36.4%) 등 주요국 상당수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석유를 사들였다. 이렇다 보니 미국의 올해 원유 수출액은 434억 달러로 전년 대비 21.4% 늘었다. 미국산 석유 수입이 사실상 차단된 중국은 캐나다(104.5%)와 브라질(91.1%)산 원유를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배 가까이 수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동 대신 대서양 연안 북중미가 새로운 에너지 허브로 도약한 셈이다.
이 같은 탈중동 경쟁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중동 원유 수입 의존도가 95%에 달해 미국·이란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원유 조달처를 미국·중앙아시아·에콰도르 등으로 다각화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인도 역시 러시아는 물론 나이지리아·베네수엘라 등 비중동 원유를 닥치는 대로 수입하는 형편이다. 상대적으로 중동 수입 의존도가 낮았던 EU도 중앙아시아와 남북미에서 원유를 더 수입하며 위험을 회피하는 모습이다.
김태현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두 나라에 석유 수급의 80% 이상을 의존하는 반면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2~5위 수입국의 비중이 10~15% 수준을 유지하며 잘 분산된 편”이라면서도 “문제는 상위 5대 수입국 중 미국을 제외한 모두가 호르무즈해협에 위치해 있어 지정학적 위험에 크게 노출돼 있다”고 분석했다.
수급선을 다변화할 때 다양한 리스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핵심이다. 예컨대 대부분 멕시코만에서 시추되는 미국 석유는 여름철 대형 허리케인이 올 때마다 생산이 멈춘다.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등도 새로운 원유 공급자로 떠오르고 있지만 지역 분쟁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중앙아시아 원유 공급자의 대표 격인 카자흐스탄의 경우 카스피해를 제외하고는 바다를 접하고 있지 않아 대량 수출을 위해서는 파이프라인을 증설해야 하는 처지다. 김 연구위원은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도입선 다변화가 미국 등 다른 지역에 편중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또 다른 위험 요인에 시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계에서는 중동 외 지역에서 수입한 원유를 충분히 쓸 수 있도록 설비를 전환하는 데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계 곳곳에서 나는 석유의 품질은 밀도에 따라 크게 경질유와 중질유로 나뉜다. 이 품질에 따라 구성 성분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를 정제하는 설비는 투입하는 원유의 화학적 특징에 맞춰 설계된다.
한국 정유 업계는 산업화 과정에서 중동산 원유에 크게 의존해왔기에 여전히 설비 대부분이 중동산 중질유에 맞춰진 상태다. 이 때문에 정유사들은 지정학적 위기로 중동 원유 가격이 치솟아도 손쉽게 원유 수급처를 바꾸지 못한다.
정유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미국산 수입을 염두에 두고 설비를 전환한 사례가 있지만 일부분에 불과하다”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중동산 원유가 가장 싸다 보니 정유사들이 중동산 중심 설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근 석유화학 업계가 구조조정을 하고 있으니 이에 발맞춰 일부 정유 설비를 경질유 중심으로 전환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의견이다.
산업통상부가 미국·이란 전쟁 가운데 시행한 스와프 정책도 이 같은 정유 업계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중동 물량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세계 곳곳에서 되는 대로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품질 문제로 원유를 구해도 바로 사용하기 어렵다. 반면 비축유는 대부분 중동산 원유여서 국내 설비에 언제든 투입할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정유사가 대체 물량을 확보한 뒤 송장을 제출하면 국내 비축 물량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급 불안을 완화했다.
한편 원유 수급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소비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석유를 개발하려는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장 설비 전환이 어렵다면 세계 곳곳에서 나는 중질유 개발에 적극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며 “한국가스공사가 캐나다의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에 참여해 물량을 확보했듯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진행되는 사업에 참여해 필요 시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