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시스템통합(SI) 업계의 이목을 한꺼번에 끈 입찰 공고가 나왔다. 우리은행의 인공지능 전환, 즉 AX를 위한 AI 에이전트 구축 사업이었다. 은행 업무 전반에 대규모 AI 에이전트를 도입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우리은행은 AX 추진을 위해 그래픽처리장치(GPU) 200장 이상을 구매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AI 에이전트 구축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는 삼성SDS가 선정됐지만, 업계는 여전히 사업의 진행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사업의 성패에 따라 다른 시중은행은 물론 증권, 보험, 카드업계로 AX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업계에서는 AX가 과거 시장을 달궜던 메타버스, 대체불가토큰(NFT) 열풍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본다. AI로 업무 생산성과 효율성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서비스로 고객 접점까지 바꿀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SI 기업들도 금융권 특성에 맞춘 AX 역량을 앞세워 이 기회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은행부터 직원 업무 개선에 속도
금융업권에서 AX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회사다. 금융회사는 돈을 매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 특성상 신기술 도입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보안성과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고객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행권이 AX 추진에 속도를 내는 것은 금융회사 역시 생존을 위해 AI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AX 과정에서 우선 주목하는 영역은 직원 업무 혁신이다. 조성우 LG CNS 금융AX1사업담당 상무는 “금융기관에서 AI가 혁신을 일으키는 분야는 크게 고객 경험과 직원 업무 생산성인데, 최근에는 생산성 혁신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라며 “금융은 숫자 기반 서비스인 만큼 아주 낮은 수준의 할루시네이션, 즉 환각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이 AX를 적극 추진하고 있음에도 고객 입장에서 당장 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SDS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우리은행 AI 에이전트 구축 사업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드러난다. 우리은행은 고객관계관리(CRM), 기업여신, 자산관리, 내부통제, 고객상담, 업무자동화 등 29개 주요 업무에 AI 에이전트를 도입해 직원 업무 효율을 높일 계획이다. 황수영 삼성SDS 금융담당 부사장은 “은행원이 고객의 자산관리 분석 보고서를 만들거나 기업을 분석할 때 AI 에이전트를 활용할 수 있다”며 “프라이빗뱅킹(PB) 고객이나 기업고객은 은행원을 통해 서비스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제공되는 것을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금융사들이 AX 사업에서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기능 중 하나는 ‘코드 어시스턴트’다. 코드 어시스턴트는 기존 코드를 해석하거나 새로운 코드를 작성하는 과정에 AI를 활용하는 기능이다. 개발자들이 작성한 C언어, 자바 코드를 분석하고, 신규 코드를 생성하는 데 쓰인다. 이를 활용하면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개발자 개인의 성향이나 기호에 좌우되지 않는 표준화된 코드를 만들 수 있다.
사기거래 탐지도 AI 효과가 기대되는 업무 영역으로 꼽힌다. 조 상무는 “기존 사기거래 탐지는 사전에 설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거래만 걸러내는 방식이었다면, AI 에이전트를 활용하면 사전에 정의되지 않았더라도 평소와 다른 거래나 의심스러운 행위까지 탐지할 수 있다”며 “사람이 쉬는 동안에도 AI가 계속 작동한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은행 외에 보험사와 카드사도 서비스별 AI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보험사는 가입 설계와 고객 상담 자동화에 AI를 활용할 수 있다. 카드업계에서는 비자와 마스터카드를 중심으로 결제까지 자동화하는 ‘에이전트 커머스’ 기능을 시험·검증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망 분리, 휴먼인더루프 고려해야
금융권의 AI 전환은 망 분리 규제를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내 금융회사는 내부 업무망과 외부 인터넷망을 물리적 또는 논리적으로 분리해 운영해야 한다. 해킹과 정보 유출을 막고 금융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다만 이 규제는 금융사가 외부에서 개발된 최신 AI 서비스나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활용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SI 기업들이 금융회사에 온프레미스 방식으로 AX 사업을 구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프레미스는 외부 클라우드가 아니라 회사 내부 서버나 데이터센터에 AI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운영하는 방식이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모델도 금융회사 환경에 맞춰 온프레미스 형태로 구축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조 상무는 “온프레미스 방식으로 구축한 뒤에도 AI 모델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며 “그만큼 상당한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황 부사장도 “별도 연구개발망을 설치하면 은행원들이 그 망 안에서 바이브코딩이나 챗GPT를 활용할 수 있다”며 “일부 인터넷은행은 이미 별도의 연구개발망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앤스로픽의 사이버 보안 특화 AI 모델인 ‘클로드 미토스 프리뷰’가 인간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취약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AI가 보안 위협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일부 영역에 한해 망 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금융업의 특성상 망 분리 규제가 전면적으로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금융사의 AX가 성과를 내려면 업권별 특수성과 전문성을 AI 시스템에 정교하게 반영해야 한다. 내부 규정, 상품 설명서, 고객 상담 기록, 리서치 자료, 각종 매뉴얼 등을 AI가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다. 조 상무는 “금융권에서는 설명 가능한 AI와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가 중요하다”며 “고객에게 AI가 왜 이런 결과를 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AI가 판단한 순간에 대한 증거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뱅킹 업무도 ‘제로 UI’
금융권과 SI업계는 AX 사업과 함께 차세대 전산망 구축 사업에도 주목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은행은 15~20년째 유닉스를 주 전산시스템으로 사용하고 있다. 운영 기간이 길어지면서 기술 지원이 줄고, 시스템 기반 언어인 C언어를 다룰 수 있는 개발자를 확보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은행들이 리눅스 기반 전산망 전환을 추진하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향후 1~2년간 약 2조 원 규모의 발주 시장이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AI 기술 수요가 커지고 있다. 황 부사장은 “차세대 전산망을 구축하면서 AI 코드 어시스턴트를 넣어달라는 요구가 많다”며 “신규 코드 작성뿐 아니라 C언어를 자바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LG CNS도 올해 1월 농협은행과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AI 솔루션을 도입했다. 기존 프로그램을 분석해 산출물을 만드는 작업 등에 AI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업계는 AI 기술이 고도화되면 금융 서비스의 형태도 빠르게 바뀔 것으로 본다. 카카오뱅크가 고객이 일상 언어로 대화하듯 이체를 요청하면 AI가 이를 대신 처리해주는 ‘AI 이체’ 서비스를 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 상무는 “금융권에서도 AI 이체와 같은 ‘제로 UI’ 서비스가 구현될 수 있다”며 “앞으로 5년 안에 AI 기반 금융 서비스가 상향 평준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