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의 마지막 날, 베를린 필하모닉이 시즌 폐막을 알리는 발트뷔네 야외무대의 열기는 뜨거웠다. 모든 사람에게 열린 울창한 숲속에서 이 소문난 콘서트를 이끈 이는 구스타보 두다멜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찾아간 지휘자의 방에서, 처음 마주한 이방인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품어주던 그의 포용력을 필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왜 그토록 이 젊은 거장에게 매료되는지, 그 답은 음악적 실력 못지않게 인간을 향한 그의 다감한 친화력에 있었다. 그리고 그 따뜻한 리더십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그를 키운 고국 베네수엘라의 기적 ‘엘 시스테마’와 마주하게 된다. 위험에 노출된 빈곤층 청소년들에게 클래식 교육을 통해 치유와 성장을 도모했던 이 놀라운 프로그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전하며 변주되고 있다.
이 상념의 파편들이 최근 극장에서 만난 영화 ‘비발디와 나’의 영상 위로 오버랩됐다. 18세기 번영의 끝자락에 선 베네치아, 그 화려함의 이면에 자리한 유기 아동 보호소 ‘피에타 고아원’은 오늘날의 엘 시스테마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던 고아 소녀들과 그들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리더 체칠리아의 위태로우면서도 강인한 눈빛은 두다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그 어두운 공간 속에서 소녀들을 음악의 세계로 인도하며 영혼을 깨우던 안토니오 비발디는 그 자체로 300년 전의 엘 시스테마가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인용된 대사처럼 ‘돈키호테’의 충직한 시종 산초 판사는 음악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음악이 있는 곳에는 어떤 악도 존재할 수 없다.” 영화 속 피에타의 소녀들은 세상의 가장 거친 불행을 먼저 배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비발디의 지휘 아래 활을 켜고 숨을 불어넣는 순간, 그 격정적인 선율 안에서 소녀들은 세상의 모든 악의와 소외로부터 보호받는 신성한 울타리를 선물받았다. 비발디가 그들에게 건넨 것은 단순한 악보나 기교가 아니었다. 삶의 비루함을 이겨내고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낼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방패막이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묵인해온 우리 음악 교육의 고루한 초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고액의 레슨과 최고급 악기, 철저하게 계산된 엘리트 코스만이 훌륭한 음악가를 키워내는 유일한 통로인 양 굳게 믿어온 착각. 그러나 비발디의 소녀들이 증명했고 두다멜이 웅변하듯 진정한 예술의 기적은 가장 낮고 그늘진 결핍의 땅에서도 피어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소외 계층을 아우르는 보편적 예술 교육은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신적 토양을 다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이 지닌 영원성의 가치는 유행의 속도에 있지 않다. 클래식에는 인간 본연의 고독을 어루만지고 시대를 초월해 영혼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 베네치아의 찬란한 몰락 속에서 피어난 비발디의 ‘사계’가 그러했고 베네수엘라의 슬럼가에서 피어난 두다멜의 에너지가 그러했다. 음악이 깃든 곳에 악이 존재할 수 없다면 반대로 음악이 사라진 사회는 얼마나 삭막하고 위태로울 것인가.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 전, 지난해 여름 발트뷔네에서 필자를 따뜻하게 맞아주던 두다멜의 미소와 피에타 소녀들의 격정적인 연주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우리 사회의 차가운 골목 구석구석에도 이 위대한 음악의 구원이 스며들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