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마포구의 한 빌라 앞. 건물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기 앞에는 차량 접근을 막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차량이 없는 시간에도 입간판이 그대로 놓여 있어 다른 이용자들은 충전기를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충전기는 2022년 서울시 보조사업을 통해 설치된 ‘공용’ 시설로 무공해차 통합누리집에는 ‘24시간 개방’으로 안내돼 있다. 그러나 실제 사용 내역을 보면 카드 2개만 반복 조회돼 특정 이용자만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주민 박 모 씨는 “집주인이 전기차를 타고 이 충전기를 쓰는데 1년 넘게 다른 주민이 이용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공용 충전시설 설치를 지원하고 있지만 일부 시설에서는 특정 이용자가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충전기를 사실상 독점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이달 전기차 누적 등록 대수는 100만 대를 넘어섰고 충전시설 설치 예산도 2021년 923억 원에서 지난해 6187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하지만 운영·관리 체계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공공 인프라가 사실상 사유화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노골적인 독점 사용뿐 아니라 제도 허점을 이용한 ‘꼼수 주차’도 문제로 꼽힌다. 친환경자동차법에 따르면 전기차 충전구역에서는 급속충전시설의 경우 1시간, 완속충전시설의 경우 14시간 이내까지 주차가 허용된다. 문제는 주차 시간이 기준이어서 실제 충전을 하지 않더라도 단속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부 이용자들이 충전 없이 차량을 장시간 세워두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결국 다른 이용자들의 불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카페 ‘전기차 동호회’에는 관련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충전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는 게 매너다” “이웃이라 참고 있지만 불편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체 대응에 나선 사례도 있다. 최근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전기차 충전 없이 주차만 할 경우 조치하겠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해당 아파트 주민은 “민원이 계속되자 관리사무소가 양심적으로 이용해 달라고 공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충전구역에 단순 주차만 한 전기차를 제재할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된다. 현재 제도는 충전 여부가 아니라 주차 시간 위주로 적용돼 이용자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9일에는 전기차 충전구역에서 충전하지 않은 차량이 ‘충전 방해 행위’에 해당하는지를 묻는 민원이 국민신문고에 접수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기후환경본부 친환경차량과 관계자는 “충전구역 이용 효율이 떨어지면서 민원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며 “산업통상부에도 법령 개정을 요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개선 방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개별 단속에 의존하기보다 시스템 기반의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아파트 전기차 충전구역의 경우 이웃 간 갈등으로 번질 수 있어 신고가 쉽지 않다”며 “통신 기능이 탑재된 충전기 보급을 확대해 충전 완료 시간을 실시간으로 안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태료를 부과하는 방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용자 혼란을 줄이기 위해 법령 용어를 보다 명확히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권 교수는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충전구역·충전시설·충전행위 같은 개념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며 “충전 방해 행위의 기준과 관련 설명을 보다 명확히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