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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미술관서 포도뮤지엄까지…예술로 이어지는 ‘SK정신’

17.04.2026 1분 읽기

멀리서도 느껴지는 반짝임의 근원은 표면을 뒤덮은 좁쌀만 한 유리구슬들이다. 본래 이 구조물은 가시철사로 뒤덮인 철조망이었다. 키보다 훨씬 높은 철조망은 건너편을 볼 수는 있으나 절대 넘어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이다. 한국인에게는 분단의 휴전선을 떠올리게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제도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이었다. 노동집약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현대미술가 라이자 루는 2005년 뉴욕을 떠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갔고 현지 공예가들과 협업했다.

네 면의 폭이 각 4m, 높이 3.3m인 철조망에 작은 비즈를 한 알씩 핀셋으로 집어 붙였다. 20여 명이 꼬박 1년을 매달렸다. 역사의 폭력과 개인의 고통이 수십만 개 반짝임으로 치환됐다. 반짝이는 것이 보석뿐이겠는가, 눈물과 땀방울도 숭고하게 반짝인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게 예술이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의 특별한 전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서 만난 루의 작품 ‘시큐리티 펜스(Security Fence)’다.

전시의 시작 지점에서 마주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연일 전쟁 소식이 뉴스를 뒤덮는 상황이라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모나 하툼의 작품이다. 철근과 함께 매달린 수십 개 콘크리트의 무게는 총 1.6톤이라 한다.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 있는 듯 기묘한 위태로움을 보여준다. 1952년 레바논에서 태어난 작가의 부모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기독교 난민이었다. 1975년 런던을 방문한 그는 별안간 고국에 내전이 발발하면서 10년 넘게 난민이 됐다.

천장이나 벽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콘크리트, 별안간 툭 떨어질지도 모를 불안한 존재로서 콘크리트 덩이의 상황은 모호한 국적의 난민 처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 뒤쪽 바닥에 흩어져 있고 벽을 따라 배열되기도 한 296개의 금속판들은 마치 고대 유적에서 꺼낸 유물같다. 금속판에 새겨진 글귀는 2020~2021년 미국 대선과 의회 폭동 등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정치적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제니 홀저의 작품 ‘커시드(Cursed·저주받은)’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저주판은 원한이나 적개심을 금속판에 새겨 땅에 묻는 방식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디지털 언어로 영구히 박제되는 듯해 더 섬뜩하다.

자연에 폭 안긴 포도뮤지엄 건물은 서울 예술의전당,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등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김석철(1943~2016)이 2011년 설계했다. 가까이에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준(1935~2011·유동룡)의 작품으로 유명한 비오토피아·포도호텔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타미준은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에서 영감을 받아 호텔을 설계했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꼭 한 송이 포도같아 ‘포도호텔’로 불리게 됐다. 포도뮤지엄에도 그 친근한 이름이 자연스레 붙었다.

포도뮤지엄은 2021년에 개관했다. 선동과 혐오,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을 공감과 포용으로 극복하자는 묵직한 주제를 들고 나왔지만 스토리텔링이 살아있는 다정한 전시들로 풀어내 호응을 얻어가는 중이다.

이런 포도뮤지엄에서 종종 워커힐미술관이 느껴진다. 워커힐미술관은 지금의 광진구 그랜드워커힐호텔인 옛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1984년 개관했다.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이자 최종현(1929~1998) SK그룹 선대회장의 부인인 우란 박계희(1935~1997) 관장이 기획부터 운영까지 도맡았던 한국의 1세대 사립 미술관이다.

박 관장은 미국 미시간주 캘러머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유학 중 만난 남편과의 결혼으로 미술과 잠시 멀어진 듯했으나 워커힐미술관과 함께 더 큰 꿈을 현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개관전이 ‘1960년대 한국현대미술-앵포르멜과 그 주변’이었다. 지금은 ‘단색화(1970년대 단색조 추상미술)’가 한국 미술의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적던 시절이었다. 박 관장은 한창 커가는 한국 현대미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개관하던 그해 국내 최초로 앤디 워홀 전시도 개최했다. 이후 아르망, 앤서니 카로,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등 거장들의 개인전을 열어 당시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국제적 미술을 소개하는 데 공을 들였다. 조각·설치미술·행위예술을 비롯해 판화와 공예 등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박 관장은 알렉산더 콜더, 데이비드 스미스 등 400점 가까운 소장품 대부분을 직접 수집했고 총 138회의 전시를 손수 기획했다.

최 선대회장과 박 관장은 금슬 좋기로 당시 재계에서 으뜸가는 부부였다. 1997년 최 회장이 폐암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갔을 때 박 관장도 함께 출국해 곁을 지키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먼저 세상을 떠났다. 워커힐미술관은 그룹 차원의 지원 없이 회장 부부의 사비로 운영됐다. 박 관장 타계 이후 미술관이 결국 폐관에 이른 이유가 됐다. 많은 미술인들이 그리워하는 박계희 관장의 이름은 2014년 박 관장의 딸 최기원 이사장이 어머니의 호를 따 설립한 우란문화재단으로 이어졌다.

그랬던 SK그룹의 예술 실천이 최근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서울 삼청공원 인근의 ‘선혜원’도 그중 하나다. SK그룹 창업주 최종건 회장(1926~1973)의 사저였고 그간 그룹 연수원으로 쓰이던 한옥 공간이 3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새롭게 태어났다. 지난해 9월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가 기획한 ‘선혜원 아트프로젝트(Art Project) 1.0’의 일환으로 현대미술가 김수자 전시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한옥의 실내 바닥 전체를 거울 패널로 덮은 김수자의 장소특정적 설치 작업 ‘호흡’은 그간 해외미술관에서만 선보였고 국내 전시는 선혜원 프로젝트가 처음이었다. 당시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RM과 배우 박보검 등 유명인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 인연이었는지 지난달 BTS가 공개한 신곡 ‘스윔(SWIM)’의 뮤직비디오 촬영지가 선혜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또 한번 화제가 됐다.

포도뮤지엄은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아 세계 주요 문화예술 기관과 협력해 글로벌 예술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15일(현지시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린 ‘우먼 앤 더 크리티컬 아이(Women & the Critical Eye)’의 후원자로 SK와 포도뮤지엄이 이름을 올렸다. 2014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미술계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예술가와 전문가, 여성 소장가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그 취지에 공감한 SK와 포도뮤지엄은 3년간 이 연례행사를 후원하기로 했다.

9월에는 미국 최대 규모의 아시안 미술관인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Asian Art Museum)에서 열리는 한국 단색화의 거장 하종현의 미국 첫 회고전도 지원하기로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 세계 무대에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맡겠다는 취지다.

포도뮤지엄은 내부 기획전뿐만 아니라 외부 설치 작품도 특별하다.

“사랑은 어두움을 소멸시키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에너지다.”

미술관 입구 쪽 야외 공간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설치된 로버트 몽고메리의 작품 구절이다. ‘광고판을 시(詩)로 파괴하는 예술가’라는 별명을 가진 몽고메리는 도시인들이 바쁜 일상 중에도 잠시 멈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가다. 2022년 루브르 박물관 튈르리 정원이 처음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했을 때도 선보인 이 작품은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의 에너지임을 보여준다.

우고 론디노네의 설치작품 ‘태양(Sun)’과 슈퍼플렉스의 그네형 설치 작품을 지나 뒷뜰까지 돌아보자. 언덕 저편에 마치 이삿짐인 듯, 낡은 상자와 오래된 매트리스 따위를 쌓아놓은 것 같은 형태의 작품(?)이 보인다. 김홍석 작가의 ‘기울고 과장된 형태에 대한 연구-러브’이다. 쌓인 것들의 형태가 세로로 ‘L·O·V·E’를 그리고 있다. 나눔과 포용의 마음으로 일군 예술이 닿는 곳에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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