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은행·보험업권 자본 규제를 완화해 총 99조 원 규모의 자금 공급 여력을 마련한다. 특히 중대형 금융사고에 대해서는 자본 규제상 불이익을 받는 기간을 10년에서 최소 3년으로 줄이기로 했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로 약 1조 원의 과징금이 예상되는 금융지주·은행의 자본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17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 16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제5차 생산적 금융 대전환’ 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뼈대로 하는 자본 규제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방안에는 중대형 금융사고에 대해 은행이나 금융지주가 잡아야 하는 자본 리스크 비용을 덜어주는 안이 포함됐다. 구체적으로는 △3년 이상 자본 비용을 인식했고 △운영 리스크 순손실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 이상인 금융 사고를 위험가중자산(RWA) 산정에서 제외한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 사고가 발생한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책무구조도 개선을 비롯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한 뒤 금융감독원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관련 소송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용도 전부 해소해야 한다.
이에 따라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로 과징금을 내야 하는 금융지주도 약 3년 뒤에는 자본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금융 당국에서는 과징금의 약 7배를 최대 10년간 RWA에 반영하도록 해왔다. 금융 당국의 추산에 따르면 금융 사고 관련 자본 규제 완화로 5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NH농협)별 보통주자본(CET1) 비율 증가폭은 최대 0.26%포인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금융 당국은 은행이 해외 금융사에 장기간 투자하는 지분과 해외 점포가 보유한 이익잉여금을 RWA 산정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위는 스트레스 완충 자본 도입에 대해서도 “규제를 강하게 조이면 자본 공급을 제한할 수 있다”며 신중론을 보였다.
보험업권 규제도 푼다. 국민성장펀드를 비롯한 정책 프로그램에 투자할 때는 지급여력비율(K-ICS·킥스) 계산에 쓰는 위험계수를 49%에서 20% 이하로 완화한다. 위험계수가 20%인 인프라 투자 대상에 신재생에너지와 인공지능(AI) 기반 시설도 포함한다. 적격 벤처투자의 위험계수도 49%에서 상장주식 수준인 35%로 낮춘다.
사실상 사문화돼 있던 매칭 조정(matching adjustment)의 활용도도 높이기로 했다. 매칭 조정이란 보험사의 자산·부채 듀레이션(가중 평균 만기)가 일정 부분 일치하면 국채 대신 보험사의 투자 자산 수익률을 토대로 보험부채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국채는 투자 자산보다 수익률(할인율)이 낮기 때문에 매칭 조정을 이용하면 보험부채가 보다 낮게 잡히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현행 규제에서는 자산·부채의 현금흐름이 100% 맞도록 요구해와 사실상 매칭 조정 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이에 금융 당국에서는 이번 규제를 통해 변동 금리 자산에 대해 10% 이내의 오차가 발생해도 매칭 조정을 허용하기로 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매칭 조정 규제를 완화해 국내 보험업권의 생산적 금융 재원을 확보한 바 있다.
금융 당국에서는 이번 조치로 은행권 기업대출 74조 5000억 원과 보험사 인프라 대출 24조 2000억 원을 포함해 총 98조 7000억 원의 자금 여력이 생긴다고 추산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번 조치는 일종의 정책 추경”이라고 강조했다.
